<?phpxml version="1.0" encoding="utf-8" ?>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늘찬양하는삶 &amp;gt; 늘찬양하는삶 &amp;gt; 신약여성인물강해</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item>
<title>칭찬받은 여자사도 유니아</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33</link>
<description><![CDATA[<p> ♣ 칭찬받은 여자사도 유니아 ♣<br />                  롬 16:7,16.2003.11.19. 늘찬양교회</p><p><br />      성경에는 부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br />아담과 하와에 이어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 그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삽비라와 아나니아 등 많은 부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바울의 친척이었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부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정확히 부부였는지, 아니면 남매였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더욱이 ‘유니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성서  비평학이 발전하면서 현대에서는 ‘유니아’가 여성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br />그렇다면 ‘유니아’는 어떤 여성이었을까요?</p><p><br />                    Ⅰ. 바울의 "친척"이었다.</p><p>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절) </p><p>바울은, 여기서 자기 친척(my relatives)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실에 대하여 기쁘게 여기며 그들에게 문안을 전하는 것을 봅니다. 여기  "친척"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슁게네이스’로서 "동포"란 뜻입니다. </p><p>바울은 자기 동포 곧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뼈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9:3). 이와 같은 심리 내면에는 동족이란 혈연(血緣) 관계보다 하나님 중심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았으며,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9:4),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약속을 받았던 백성이 약속의 성취로 오신 메시야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영접하지 아니하므로 인하여 이방(異邦) 전도에 큰애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p><p>만일 그의 동포인 이스라엘 민족이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진리대로 산다면, 이방인들이 그것을 보고 더욱 힘있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많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백성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말미암아 선교에 막대한 지장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던 차에 그의 친척인 유니아가 이전부터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던 자임을 발견하고는 너무나도 반가웠던 것입니다.</p><p>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외로움과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죽음의 고비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자신의 험난한 앞길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 이었기에 결혼도 포기하고 혼자 살기로 서원 하였습니다. 그러하였기에 더더욱 사람에 대한 애착이 컸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를 영적 아들로 여기며 마가를 보고싶다고 오는 길에 함께 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을 보아서도 그런 외로운 마음을 한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조카인 ‘안드로니고’와 그의 아내 ‘유니아’를 예루살렘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더욱이 ‘유니아’의 정성을 다한 돌봄과  섬김의 은혜를 받게되어 더욱 힘과 용기가 낳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듯 친지의 정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정은 같은 믿음에 의하여 더 가깝게 연결됩니다.</p><p>마치 바나바가 지극한 정성과 관심을 가지고 사도 마가를 돌보고 영적으로 가르침으로 1차 선교여행에서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가족 중에 친척 중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서나 무리 속에서의 외로움을 덜 당하게 될 것입니다.</p><p>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만해도 저희 가족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였는데 지금은 전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물론 목회 하는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척과 친지 중에서도 많은 집사 님들이 생겨난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상당한 위로와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바울에게서도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자신의 큰 자랑거리요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p><p>사랑하는 성도 여러분!<br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명절이나 큰 일로 모여서 함께할 때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정말 누구 엄마(집사님)는 믿음이 참 좋으세요! 집사님의 그 같은 성실함과 진실함이 저희들에게 참 위로와 기쁨과 힘이 됩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t; 그렇지 못하고 반대로 “집사님이 되가지고 맨날 부정적인 소리만 하고 남의 흉만 보고 다니니 창피해....창피.......” 그런 소리를 들으면 주님이 영광을 가리는 것이니 조심하여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gt;   <br /> </p><p>             Ⅱ. 바울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한 유니아 </p><p>  “....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니라.”(7절)<br /> <br />“나와 함께 갇혔던”은 ‘쉰아이크말로투스 무’(συναιΧμαλώτους μου)로서 그 뜻은 ‘함께 투옥된 동료 죄수‘라는 의미입니다. ’유니아‘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여 여성으로서 사도가 되었고 더 나아가 복음을 위해 투옥의 고통도 기꺼이 감수한 진실한 사역자 이었습니다. 핍박과 고통을 피하는 기회주의적 여사도가 결코 아니라 파울과 함께 당당히 투옥되어 복음의 진실성을 몸으로 증거한 위대한 여사도 이었습니다.</p><p>바울과 함께 이들이 갇혔던 때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수난 당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갇혔던" 사건을 말하며 보여준 것은, 첫째: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과 아픔을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자리임을 강조하며 담대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벧전 4:13-14은 말하기를,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혼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바울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와 함께 수난을 당하는 중에 서로 형제와 같이 가까워졌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 5:9-10과 계1:9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함께 수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한 형제관계(兄弟關係)의 뜨거움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p><p>그러나 주님으로 인해 고난과 아픔을 당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딤후 4:10에 보면 <br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6절에는 "다 나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p><p>목회를 하는 것도, 선교를 하겠다는 것도, 성도가 되겠다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응답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따라 그리고 자신의 명예와 유익을 따라 교회를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도 있고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떠날 수도 있습니다. </p><p>망대를 짓는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료를 가지고, 망대를 다 세울 수 있는가 계산해보고 일을 시작하듯이 우리들이 주님을 따르는 길에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어도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이같이 귀한 순종과 역사가 여러분 속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p><p><br />           Ⅲ. 사도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았던 유니아 </p><p>      “...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7절)</p><p>“유명히 여김을 받고”의 의미는 ‘두드러지게 존경을 받는’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에피세모스’(έπίσημος)는 ’두드러진, 뚜렷한‘의 의미로서 이 단어를 사람에게 사용할 때는 ’인격적으로 매우 탁월한 사람‘의 뜻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p><p>더 놀라운 사실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사도에게” 이 말은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로서 ‘사도 가운데서’라는 말로 정확히 번역하며 여사역자이었던 사도 ‘유니아’가 사도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자로 유독 존경히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유니아’가 남성 사도들이 즐비한 가운데서 보다더 유명하고 존귀한 존재로 인정을 받게 하였을까요? 하는 문제가 궁금합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p><p>먼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12사도 반열에 속한 자가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사도급(使徒級) 인물로서 이들은 본래의 사도들처럼 많은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p><p>특별히 물질로 바울을 잘 섬겼습니다. 이들이 물질이 많아서 재산이 많아서 바울을 도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청빈한 삶을 살면서도 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하여서는 헌신적으로 재정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지혜와 지식과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여성의 장점인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첨가되었으니 더욱 빛났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실성과 영성이 뛰어났을 것으로 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고 부흥집회나 기도원 집회를 가보아도 더 뜨겁게 기도하고 찬송하며 말씀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은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은혜 받았다고 자랑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 묵묵히 교회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이렇듯 여성사도 ‘유니아’는 청빈한 삶과 재정적 후원을 통해 그리고 탁월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겸손과 섬김의 영성을 가지고 묵묵히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봉사하였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p><p>그렇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물질과 섬김을 통해 바울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듯이 로마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부부는 너무나도 큰 일들을 아름답게 감당한 것을 봅니다.</p><p>특별히 행 23장 12-24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기를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하고 사십여명이 동맹하여 바울을 죽이고자 예루살렘거리에 매복하고 있을 때 바울의 생질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부부가 이 소식을 듣고 바울에게 얼른 달려가 매복사실을 보고함으로 바울은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천부장은 한 청년으로부터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하였으며 그 이후 캄캄한 밤 9시에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여 극비리에 바울을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에게까지 무사히 보냄으로 말미암아 바울의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렇듯 바울에게 있어 여사도 ‘유니아’는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p><p>정말로 여러분들도 교회에서 목사님을 잘 지켜드리며 세워나감은 물론 성도들간에 그리고 예수 안 믿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인격적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 복음도 쉽게 그리고 아름답게 증거 되어 많은 열매를 맺으며 부흥 성장하는 늘찬양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br />          Ⅳ.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유니아 </p><p>       “...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라.”(7절)</p><p>말씀을 통해 ‘유니아’가 사도 바울 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던 믿음의 선배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곧, 그들이 바울 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뜻입니다. </p><p>믿는 자는 세 가지 위치에 있습니다. 즉 출생에 의하여 아담 안에 있으며,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침(세)례에 의하여 교회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분과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p><p>‘유니아’는 일찍이 복음 받아들인 사역자 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을 기원 후 34년(32세)으로 본다면, ‘유니아’는 기원 후 34년 이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 지역에서 받아들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기원 후 34년 이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4년 내에 복음을 영접했다는 것으로서 이는 대단한 용기이며 엄청난 결단입니다. 이방인 선교가 바울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유니아가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유니아’가 진리에 대한 개방성과 순수함이 없었다면 이방지역에서 복음을 영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여사도로서의 선각자적 자질을 지닌 ‘유니아’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p>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친척이면서도 믿음의 선배임을 깍듯이 존중하며 예우하는 것을 봅니다. (레 19:32) 선배는, 후배의 경험하지 못한 일을 체험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방면에 있어서 특별히 후배보다 아는 바가 많습니다.</p><p>욥기12장 12절에 말하기를,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아울러 잠언 16장 31절에 말하기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하였고, 잠언 20장 29절에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고 하였습니다. </p><p><br />결론으로 좋은 예화 한가지를 말씀드립니다. </p><p>우물을 잘 파는 한 업자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실패한 곳도 그는 곧잘 우물을 파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신기하게 여겼고 결국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우물을 잘 팝니까?'</p><p>그러자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예! 나는 우물을 파는 데 실패한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실패한 곳에 잘 불려 다닙니다. 우물을 잘 파는 비결은 꼭 하나입니다. 나는 아무 곳이나 파지만 물이 나올 때까지 팝니다.'</p><p>새로운 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도 평균 1만2000번의 실패를 거쳐야 합니다. 유전 하나를 발견하는 데에도 스물 대여섯 번의 탐사를 해야 합니다. 러시아 속담에 '병사여, 인내하라. 곧 장군이 될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p><p>'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lt;강문호 목사(갈보리선교교회)&gt;</p><p>국민일보 겨자씨에 나오는 물이 나올때까지 파라는 제목의 말씀이었습니다. <br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의 장점이자 단점은 바울의 생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이 그리고 이들이 하나된 것이 삼촌과 조카라는 친족간의 관계 때문에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br />그리고 이들은 생질의 더 친근감과 뜨거운 정을 가지고 바울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돕는 동역자로서의 사역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에게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는 그런 사도들이 되었습니다.<br />우리교회도 목사의 가족이 여러 명이 있습니다. <br />이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br />특별히 주님 안에서 한 우물을 팔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장점을 살려서 더 열심히 <br />주님의 일에 충성함으로 자신과 교회와 영성에 참으로 귀한 축복의 열매가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br />​</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2:03:56 +0900</dc:date>
</item>


<item>
<title>외조모 로이스와 유니게</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32</link>
<description><![CDATA[<p> ▣ 외조모 로이스와 유니게 ▣<br />         딤후1:1-5, 3:15-17,2003.05.07.늘찬양교회   <br />    </p><p>    <br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너무 많이 급변하다 보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가정에서조차도 물질이나 권력, 명예 등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자매가 또는 친척과 친척이 갈라선 채 등을 맞대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p><p>요사이 저는 잘나가던 장로님의 가정이 물질로 인하여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서 도망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세상에 나가 자식이 성공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온 가족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고 작은 것 하나라도 같이 나누어 먹는 화목한 가정이 더 귀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늘 찬양 교회 성도님들의 가정 모두가 다 물질보다 믿음과 사랑을 더 중요시 여기므로 서로 아껴주고 칭찬해 주며, 격려해 주는 그런 복된 믿음의 가정들이 되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그런데 오늘 이 급변하는 시대에 신앙의 3대를 이어가며, 청결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보여 준 ‘디모데’의 가정에 대하여 특별히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 대하여  함께 공부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p><p><br />                        Ⅰ. 디모데의 가정</p><p>     디모데 가정의 믿음의 1대조는 외조모 [로이스]입니다. 외할머니의 신앙으로부터 믿음이 전수되어 2대인 어머니 [유니게]에게, 그리고, 3대인 손자 디모데에게 이르기까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p><p>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내가 우리 가정에서 믿음의 1대가 되어진 분이 계시다면 먼저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그리고 우리 늘찬양침례교회의 1대 믿음의 식구들이 된 것을 또한 기뻐하며 찬양하십시오. <br />첫 소산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p><p>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궁금하게 여겼던 점은 ‘디모데’의 가정에 어떻게 해서복음이 전파되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하기는, 그 당시 유대교인들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했으므로, 헬라인인 디모데의 아버지와 어머니 ‘유니게’를 결혼시킴에 있어 외조모 ‘로이스’가 먼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에 딸 ‘유니게’ 역시 기독교로 개종시킨 후에 두 사람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또한 '유니게'에 대해 '믿는 유대 여자'라고 누가가 소개하고 있습니다.(행16:1). 여기서 '믿는'이라는 표현은 기독교로 개종한자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낱말입니다.(행 16:14,15). 따라서 디모데의 믿음은 유대교적 신앙이라기보다 그리스도를 통한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이처럼 디모데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외조모<br />「로이스」와 어머니「유니게」에 의해서 신앙 교육을 전수 받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외조모 로이스의 결단은 위대한 것입니다. </p><p>그리고,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이름이 항상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모녀는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며 살아온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또, 행 16:1에 보면,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초기에 디모데의 어머니가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모녀는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 때이든지, 아니면 바로 그 이후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p><p><br />                Ⅱ. 디모데의 세 가지 귀한 유산</p><p>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전도자인 바울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딤후 1:5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네 외조모 「로이스와 유니게」속에 있더니 네 속에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는 말씀과 또 딤후 1:3에 '나의 밤낮 간구 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 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p><p>사도 바울이 이 두 여인과 가깝게 알고 지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든 바울이 기록한 것처럼 수수하고 거짓 없는 믿음을 자식인 디모데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딤후 3:15에 있듯이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함이니라.'는 말씀처럼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자식인 디모데에게 어려서부터 성경 말씀을 통한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의 교육을 시켰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p><p>구체적으로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p><p>첫째 : 청결한 양심입니다. </p><p>오늘 본문 3절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때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p><p>성경에 보면 양심을 말할 때 한가지로 말하지 않고 '긍정적 양심'과 '부정적 양심'을 말합니다. 긍정적인 양심으로서는 청결한 양심, 깨끗한 양심, 선한 양심, 살아있는 양심(딤전1:5,<br />1:9,3:9, 롬2:15, 벧전3:16)등이 있고, 부정적인 양심으로서는 화인 맞은 양심, 더러워진 양심, 죽은 양심(딤전4:2, 딛1:15, 히9:14)등이 있습니다. </p><p>왜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 깨끗한 양심(딤전1:19)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길로 갔다가도 바른길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p><p>깨끗한 양심과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은 어떠한 재산보다 중요한 유산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때 회개를 하게 되고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스스로 고소자요 고발자입니다. 양심은 스스로 재판자요 판결자입니다. 양심을 잃어버린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는 중심을 잃은 축과 같습니다. </p><p>우리 생활주변에는 악이 선을, 불의가 정의를, 어두움이 빛을, 거짓이 진실을 뒤집어 없고, 농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믿어버리는 비윤리적 사고와 모든 일에 지름길이나 찾으려고 하는 편의주의와 극한 이기주의로 인하여 서로가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는 배타적 심리와 혐오주의에 사회가 병들어 그 병폐가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양심의 부재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p><p>양심은 사악을 배격하고 정의와 선을 의지하는 도덕적 의식입니다. 양심은 지, 정, 의, 의 종합적 의식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양심을 더럽히지 말고 청결하고 깨끗하게 보존하여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청결한 양심을 하나님을 찾아가는 등불이요, 삶을 행복하고 보람 되게 하는 소중한 유산입니다</p><p>2. 디모데는 진실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p><p>사도 바울은 본문5절에  "네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br />'거짓이 없다.'함은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진실이야말로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대의 유산입니다. 진실이란 '참됨, 순수함, 성실함, 신용할만함' 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서 위선과 외식과 불성실함의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무섭게 책망한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거짓 위선과 외식 즉 진실치 못함이었습니다.</p><p>속임수를 쓰고 거짓말을 적당히 하고 어물어물 살아가는 자가 현명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속이는 자가 흥하고 정직한 자가 망한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하게 살아야하고 그 진실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직한 사람, 진실한 사람 성실한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 </p><p>세계적인 유명한 백화점을 경영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가리켜 백화점 왕이라고 까 지 일컬었습니다. 그는 젊어서 남의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집에서 점원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어떤 아가씨가 웨딩드레스를 사러와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놓고 이것이 어떻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드레스는 어깨 쪽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드레스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손님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었고, 그 손님은 결국 물건을 사지 않고 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가슴을 쳤습니다. 그냥 좋다고만 했으면 팔 수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정직하게 손님을 대하고 점점 신용을 얻어  나중에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백화점을 경영하는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p><p>거짓 없는 진실이야말로 성공의 자본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진실한 삶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진실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진실한 자가 받는 축 복을 누리며 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p><p>3. 디모데는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p><p>오늘 본문5절에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p><p>디모데는 외조모와 어머니로부터 거짓 없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산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대부분 의 사람들은 자녀들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재산을 유업으로 남기기도 하고, 지위나 권력이나 기술 혹은 학문과 명예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 보다 더욱더 중요한 유산을 건강한 정신적 유산과 신앙의 유산입니다. </p><p>미국을 개척한 청교도들이 그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산가운데 가장 값지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부개척정신과 청교도적 신앙입니다. 이러한 개척정신과 청교도적 신앙이 오늘날 미국을 이루어 세계의 거부가 되고 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신앙은 무에서 유를 창 조하고,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게 하며 죽음에서 부활하는 잠재 적 창조력을 발휘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과 능력이 됩니다.</p><p>[예] 미국에 조나단과 사라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앙으로 결혼하여 가난하게 통나무집에서 살았습니다. 건강하여 딸 다섯 아들 일곱 12명을 낳았는데 1명은 호열자로 세 살 때 죽고 11명이 살았습니다. 이들 11명은 모두 미국 역사책에 나올 정도로 훌륭하게 되었습니다. 조나단과 사라의 외손 친손 82명을 얻었는데 62명이 170 년 지난 지금도 미국 역사책에 나왔다. 그 집 앞 간판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 이 집은 작습니다 그러나 이 집은 위대한 집입니다. 이 집은 초라합니다. 그러나 이 집을 통해 오늘의 위대한 미국을 이루었습니다.」 </p><p>12년 전 기록에 의하면 부통령1명, 주지사3명, 총장13명, 변호사 139명, 판사33명중 대법원 판사11명, 75명의 대 사업가, 68명의 의사, 116명의 목사 82명, 차관급 공무원과 장관이 나오고, 66명의 교수, 25명의 대 변증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가문에 대하여 연구한 하버드대학 옥스너드 교수는 "이 집은 자녀에 대해 특별히 관심갖은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하고 별난 교육을 시킨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녀 앞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질서 속에서 진실하게 선하게 믿음으로 살았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조나단과 사라의 가문은 올바른 정신적 유산과 온전한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준 가정입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가 생명력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된 것입니다. </p><p><br />                Ⅲ. 내 자녀에게 남겨줄 유산</p><p>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어떤 유산을 우리의 자녀에게 남겨 주어야 할까요? </p><p>언젠가 대 기업의 창업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믿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손들은 재산 때문에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았고 집안이 화목하지를 못했습니다.</p><p>작은 아들이 지방 도시에서 그를 모시고 살았고, 맏아들은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맏아들은 부친의 죽음을 듣고 즉시 차를 몰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부친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p><p>그는 동생을 보자마자 아버지의 재산을 얼마나 물려받았는지를 물었습니다. 동생이 800억 정도의 유산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는 다짜고짜 동생의 멱살을 쥐고서 얼굴을 쥐어박았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잘못 때렸는지 그만 동생의 눈이 다치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동생의 아들들이 "큰아버지고 뭐고 다 때려죽이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p><p>겁이 난 맏아들은 밤중에 차를 몰고서 서울로 도주를 했습니다. 그러다 차를 잘못 몰아서 그만 저수지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맏아들의 가족들은 그가 죽게된 원인이 둘째 아들의 가족에게 있다고 생각하고서 복수하기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양 집안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고 죽은 사람들의 장례식은 남들이 다 치러 주어야 했습니다.</p><p>재산을 유산으로 물려준 부모는 그 재산 때문에 자식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준 아들은 영원토록 그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p><p>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 중에 신앙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 부터 믿음을 전수 받았습니다. 전수 받은 그 믿음으로 인해 복음전파사역에 바울을 대신하여 달려갈 수가 있었습니다.</p><p>그러나, 우리는 내 때에 이루지 못한 세상 영광과 명예와 부를 자식 때에라도 누리게 하고자 필사의 사투를 하고 있습니다. 청결한 양심과 순수하고 고귀한 내면적 품성을 기르고 말씀 안에서 주의 뜻을 좇아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자녀로 키우기보다는 '일등교육','영재교육', '특수교육'을 통해 성적이 우수한 학생만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p><p>몇 년 전 모 국민하교 여 선생님이 T.V인터뷰에서 '요즈음 우리 아이들이 불쌍해요! 아이들의 가방이 선생인 저보다 더 무거워요. 또 학교 공부가 끝나면 집에 가서 쉬지도 못하고 곧장 속셈학원,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등을 전전하다 밤 10시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우리 부모님들이 너무 높은 교육열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이들의 정서 함양과 지적 발달을 위해 우리 부모님들의 욕심을 좀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고 발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p><p>뿐만 아니라 경제불황이 길어지면서 남편 월급은 제자리인데 아이들은 커가면서 과외비용 등 씀씀이가 커지다 보니까 생활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아이들의 과외비를 마련하고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충당하기 위해 취업전선으로 뛰어드는 전업주부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입니다.</p><p>전에는 주부들이 일터에 나간다면 겨우 식당 정도에서 아르바이트 삶아 일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호프집과 노래방, 단란주점 등 유흥업소에서 ‘도우미’로 일하는 주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또 백화점과 같은 대형상가와 부동산 중개업소의 아르바이트를 뛰는 주부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p><p>주부 최모(38. 인천 부평동)씨는 며칠 전부터 노래방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가족과 이웃에게는 절대 비밀에 부친 채 돈벌이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까 가정파탄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p><p>이 같은 현실이 현재 우리 가정과 부모들의 모습입니다. </p><p>결론을 말씀드립니다.</p><p>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세상 사람들의 교육 방법과는 달리 어린 디모데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신앙으로 삶을 바르게 살아가도록 가르쳤습니다. 식사 때마다, 또 무슨 일을 할 때든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쫓아 사는 믿음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물질이 아닌 믿음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겨주게 된 것입니다.</p><p>저와 여러분의 가정 역시 이런 복된 믿음의 가정이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p><p>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가정은 돈 많고 권세 있는 가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일 우선 순위로 놓고, 부모 공경이 살아있고, 형제 우애가 넘치는 가운데 화목하게 살아가는 가정이 가장 아름다운 가정임을 기억하고 내가 먼저 믿음의 1대로서, 또는 2대로서, 3대로서 본을 보이며, 내 후손 만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정통성과 아름다움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오늘도 깨어 믿음에 굳게 선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59:26 +0900</dc:date>
</item>


<item>
<title>책망 받은 유오디아와 순두게</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31</link>
<description><![CDATA[<p> ♣책망 받은 유오디아와 순두게♣<br />                   빌4:2-3,2003.11.12.늘찬양교회</p><p><br />      어느 단체든지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처음 가입한 자를 엄하게 훈련시키는 습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 때문에 조직이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집안에서는 새로 시집 온 새댁을 엄하게 훈련시켜서 그 가문에 적응하게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군대에 입대하면 신병 훈련소에서 군인이 되는 심한 훈련 과정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대라는 조직이 도저히 존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p>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누구나 와도 좋소’입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처음 온 사람에게 군대식 훈련으로 적응 기간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보살피고 인내로 돌보아 줍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는 변화되지 못한 한 두 사람의 불순종으로 얼마든지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심한 경우에는 깨어질 수도 있는 형편입니다. </p><p>저는 몇 년 전에 신학교 동문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개척연수에 비해 무척 빠른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교인들은 학력도 매우 높았으며 제법 부유층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교회성도들간에 교회관으로 약간의 논쟁과 분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p><p>어떤 분은 교회 단체보다는 개인의 영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조직화하거나 교단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교회가 보편적인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처럼 교단에도 가입하고 또 다른 교회처럼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일 예배도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교회가 별 문제없이 잘 성장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런 생각의 차이가 잠재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얼마가지 않아서 깨어지고 신앙이 어린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p><p>교회는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진리만으로 교인들을 강하게 결속할 수 없습니다. 즉 다른 하나의 요소가 필요한데 그것은 공동체가 강한 결속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즉 교회 안에 진리가 풍성한데 공동체 마저 강하게 결속되어 있으면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같은 교회 안에 있다면 마치 그 사람은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며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을지 모르는 형편인 것입니다. </p><p>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가 힘이 있으면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생각을 죽이고 거기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힘이 없으면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게 되어 있고 결국 그 공동체는 깨어질 위험을 받게 됩니다. </p><p>사실 저희 교회도 연수는 오래되었지만 교회 공동체 자체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몇몇 사람이 건축이후 교회를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있어 타교회를 다니다 들어오는 성도들에게는 왠지 조심성을 같게되는 것을 봅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한 두 사람의 기질이나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교회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깨어질 수도 있는 형편입니다. </p><p>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형편이 이와 비슷한 처지였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진리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동체 자체가 약해서 한 두 사람의 입김에 의해서 교회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오늘의 주인공 「유오디아와 순두게」라고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p><p><br />               Ⅰ. 연보와 섬김을 다하는 교회</p><p>     바울과 실라는 제 2차 선교여행을 통하여 마케도니아 지역에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행16:6-40) 빌립보는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접촉점이기 때문에 선교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로서도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통하여 경험한 해방과 자유의 복음의 감격을 잊지 않았으며, 수많은 연보와 구제 헌금으로 바울의 선교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가 계속되는 기근 속에서 수년간 고통을 당할 때 마케도니아를 대표하는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통하여 큰 액수의 구제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 주었습니다. 결코 부유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늘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 (고후8:1-3)</p><p>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중심으로 교제하는 신실한 교회이었습니다. 어떠한 인맥이나 지역적 특성으로 모여진 인위적 교회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갖고 있는 바울에게도 빌립보 교회를 향한 한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를 이끌던 중심 사역자인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p><p>로마의 식민지라는 척박한 빌립보 도시에 세워진 교회를 이끌던 두 여성 사역자가, 어떤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사이가 원만치 못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급기야는 교회의 기초를 흔들 만큼 치명적인 문제로 발전되어갔습니다. </p><p>성서학자들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두 여인 사이에 일어난 갈등의 원인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빌립보 교회 내에 들어온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대한 두 여인의 서로 다른 태도이며, 둘째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주도권 다툼’(헤게모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훈계의 내용이나 어법을 보았을 때에 두 번째 이유가 더 합당한 듯 합니다. 하지만 두 여인의 교회를 향한 지나친 열심과 자신만의 우월성을 믿는 두 여인 사이의 다툼이 교회의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p><p>                Ⅱ. 같은 마음을 품어라.</p><p>    오늘 본문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하였고 2장 1절과 2절에서도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p><p>그리스도인들은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유오디아와 순두게」사이에는 이런 것들조차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사도 바울과의 사이조차도 아주 좋지 못한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결코 그럴 정도로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편지에서 그 내용을 일부러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는 서로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p><p>우리는 모두는 다양한 기질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서 하나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됨은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불만으로 표출될 수 있고 그런 불만은 교회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해 줍니다. </p><p>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마음을 합하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br /> <br />1) 권면 <br />바울은 가장 먼저 빌립보서 2장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슨 권면’이라는 것은 설교를 말합니다. 기독교는 ‘귀의 종교’입니다. 그런 반면 천주교는 오감(五感)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직이 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권면 즉 설교가 예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너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조직보다 설교에 생명에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설교자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로 많은 성도들이 수평 이동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권면은 설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p><p>이렇듯 교회 안에 진리의 복음이 지속적으로 선포되어지며, 제자훈련이 살아있는 교회들은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믿던 성도들은 힘을 내고 믿지 않던 자들은 새롭게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 말씀의 능력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될 때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br /> 2) 사랑의 위로 <br />교인들의 가정 사정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위로와 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지금같이 어려운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사랑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형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입니다. </p><p>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중단하는 많은 성도들 중에 가장 큰 이유가 교회가 물질만 강조하고 자기 자랑만할줄 알지 서로 나눔과 희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큰 사고나 어려움을 당하여 힘들고 외로울 때 찾아주지 아니하고 내 팽겨쳐 둘 때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큰 일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이 때가 우리를 더욱 하나로 묶어주는 축복의 끈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가깝지 않던 성도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회가 왔구나’ 생각하고 뻔질나게 찾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그런 어려운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혼자 내버려두면 그때는 정말 원수가 되게 됩니다. </p><p>우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중단하고 있는 성도들의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심방을 게을리 하였던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열심히 낙심과 절망에 빠진 성도들을 찾아가 사랑의 위로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p><p> 3) 겸손 <br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고 자기 잘난 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겸손과 온유함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사람을 나 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p><p>중세 때 어느 수도원이 몰락하게 되어 사람들이 다 떠나고 다섯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이 수도원도 문을 닫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까운 곳에 한 선지자가 기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수도원의 딱한 사정을 말하고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길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지자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당신들 중의 한 사람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장은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서로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원장님을 예수님처럼 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연장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장은 다른 형제를 예수님처럼 존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온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다른 젊은 형제를 예수님처럼 대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성경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여행객이 지나가다가 그 수도원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곳이 다른 곳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섯 명이 있는데 꼭 여섯 명이 있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들만 있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거기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수도원은 다시 번창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p><p>우리는 서로를 볼 때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성가대 대원들은 지휘자를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그리고 지휘자는 반주자를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성도들은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하십시오. 특히 장애인들이나 노인 분들이 들어오시면 더욱 그 분들을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사랑으로 겸손할 때 무엇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능력과 풍성함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 안에는 반드시 주님이 계십니다.</p><p> 4) 멍에<br />바울은 3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이가 아니라 특별한 사이를 의미하고 있는 겁니다. 시골에서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가 나란히 보조를 맞추어야 쉽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복음을 위해 같이 주의 말씀을 따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가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p><p>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사가 목회자들에게 교인들에게서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 고 질문했을 때 여러 목회자가 교인들의 지지와 인정을 원한다고 대답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교인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잃는다면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집에서 전혀 식구들로부터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삶의 의욕조차 잃고 말 것입니다. </p><p>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속에서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찾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약간의 돈도 보내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방문과 물질적인 도움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p><p>“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의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빌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p><p>바울은 외롭고 힘들 때 찾아와 준 빌립보 교인들로 인해 큰 힘을 낼 수 있었고 법정에 복음을 변명할 때에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늘찬양교회를 지키고 성장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외롭고 힘든 세월을 보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집단상담에서 보여준 여러분의 참여와 사랑의 헌신은 저에게 다시금 히스기야의 기도와 같은 결단을 하고 매어 달리게 만들어 주었습니다.</p><p>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br />서로 멍에를 지고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나의 주장과 권리와 잘남을 뽐내기에 앞서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목사님의 입장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합력 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br />참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으로 생각만 하는 자가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며 고통을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p><p>            <br />               Ⅲ. 순종하는 두 여인.   </p><p>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의 질책이 담긴 권면의 말을 듣고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마음을 상한 체로 빌립보 교회를 떠나 각기 제 길로 갔을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3절)있다고 자신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두 여인은 두 사람간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목과 사랑의 길로 긍휼과 자비의 길로 능히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p><p>여러분은 때때로, 목회자와의 대화에서나 설교에서 책망을 듣습니다. 책망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망하고 있다는 건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포기한 사람에겐 책망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p><p>잠언 1:7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4:13은, "훈계를 놓치지 말고 굳게 잡아라. 그것은 네 생명이니, 단단히 지켜라"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15:32은,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책망을 들을 때 순종하라. 그것이 바로 네가 살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다"(잠6:23)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p><p>여러분,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책망할 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에 순종했지만,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에 변명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크게 들어 쓰셨고, 그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나게 하셨지만, 사울은 버리셨던 것입니다. 책망을 듣고 순종하는 것과 순종하지 않는 것, 이 둘의 차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맘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책망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p><p>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p><p>바울로부터 책망을 받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두 여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갈등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p><p>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목사와 장로가 장로와 집사가 집사와 평신도가 갈등을 일으키며 대립 속에 살아가야 할까요? 이 같은 모습은 사탄이 교회분열을 노리고 조장하는 일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목사님의 권면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드리고 사랑의 위로와 겸손의 미덕과 복음의 한 멍에를 지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며 주님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br />그리하여 빌립보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부흥되었듯이 그리고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듯이 늘찬양교회가 회복되어지고 부흥되어지며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br />​</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56:00 +0900</dc:date>
</item>


<item>
<title>자주 장사 루디아</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30</link>
<description><![CDATA[<p>▣ 자주 장사 루디아 ▣<br />                행 16:11-15,2003,05,28.늘찬양교회</p><p> </p><p>     교회활동에 있어서 여전도회가 차지하는 위치는 아주 중요하고도 소중합니다. 특히 늘찬양교회에 있어서 여전도회가 차지하는 영향력의 비율은 대단히 큽니다.  사실 교회마다 여전도회가 활성화되고 열심인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또 교회도 부흥 성장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의 관건은 '여전도회를 얼마나 성장시키고 부흥시키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p><p>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결정적인 부흥의 비결은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디아」는  그 이름이 '생산'이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마게도냐'와 유럽최초의 회심 자이며 바울의 선교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인입니다. </p><p>특히 루디아의 고향은 염색 가공업이 번창한 도시 '두아디라' 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자기의 고향에서 자색 염료로 처리된 질 좋은 옷감을 싸게 떼어와서 다른 사람들보다 싸게 팔다보니 단골 고객이 많았으며 신용도도 높았습니다. 당시의 자색 옷은 왕족이나 귀족들, 부자들만 입는 고급옷감으로 보통 사람들은 입지도 못하는 값비싼 옷이었습니다. 루디아가 이런 장사를 하려면.... 상당한 자본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그런 장사이기도 했습니다. </p><p>루디아는 이렇게 바쁜 자주 옷감 장사의 일을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음은 물론 기도생활에 열심하였던 여인이었으며 특히 자신의 집을 내어놓아 바울로 하여금 예배드리며 전도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는 교두보가 되게 하였습니다.뿐만아니라 후에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연보를 보내어 바울의 옥바라지를 도와줬던 사람도 바로 루디아였습니다. </p><p>이렇듯 루디아는 생활력도 강하고, 성격도 적극적이며, 사업 수단이 유능한... 그러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여성이었습니다. </p><p><br />      Ⅰ.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잘 공경한 루디아.(14절)</p><p>     [루디아]라는 여성은 자주장사 곧 옷감 장사를 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그녀의 생활”이 바빴는가는 한눈에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루디아는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신앙의 여인'이라고 성경은 그녀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경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p><p>              1. 예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요4:24) </p><p>    루디아는 장사를 통해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인생에 있어 예배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늘찬양교회 성도님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을 지상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며 매 예배 때마다 가슴 벅찬 영적 환희와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p>성도들의 신앙수준을 확인할 때의 척도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이 곧바로 예배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신앙의 열정이 없으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을 잘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저녁, 수요일, 금요철야, 구역예배는 물론이고 주일 낮 예배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예배를 빠지지 않고 온 마음과 열정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으니 얼마나 참된 신앙의 소유자입니까?</p><p>000 여전도회장님을 비롯하여 모든 여전도 회원님들께 부탁을 드립니다. 아무리 삶이 바쁘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여전도회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              2. 섬기며 봉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눅8:3)</p><p>    루디아는 장사하는 평범한 여인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않았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도 대통령 재임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바쁘다고 유년주일학교 교사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p><p>가만히 보면 우리 여전도회 회원들 중에 나이가 많다고, 가게 한다고, 직장 다닌다고, 애가 아직 어려서, 낮에 집 보아야 된다고 하면서 교회봉사에 등한시하는데 루디아의 신앙을 본 받아서 이번 기회에 이런 모습을 완전히 제거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p><p><br />         Ⅱ. 심령을 열어 말씀을 청종하는 신앙인 루디아(14절)</p><p>            1. 아름다운 심령을 소유했습니다.(마 5:3)</p><p>    바울은 마게도니아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자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 중에 예수 믿는사람들을 찾아보고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성문 밖 강가로 가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이 없었다는 말은... 빌립보에 사는 유대인들을 모두 합해도 열 가정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 회당이 없을 경우에는 대개 한적한 강가나 숲 속 또는 동굴 같은 곳에 기도처를 정하고 그곳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과 기도를 하며 안식일을 보내었기 때문입니다. </p><p>그런데 강가에 모여 기도하던 몇몇 여인들로부터 두아디라 성안에서 자주 장사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이 ‘하나님을 잘 공경한다.’는 칭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루디아 여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심령을 소유한 믿음의 여인으로 인정함을 받고 있었습니다.</p><p>저는 여러분에게 한가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 주위에서 누구 누구집사 누구 누구 성도 그러면 『그 사람 참 믿음이 뜨겁고 괜찮은 사람이야!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다른 사람 말은 못 믿어도 그 집사님 말은 믿을 수 있어! 교회에 저런 성도님들만 있다면 나도 그 교회 다니고 싶어!....』 하는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자신의 심령의 내면을 기도와 말씀으로 순종과 섬김으로 다듬어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p><p>           2. 복음의 믿음을 믿음으로 청종 했습다.(14절)</p><p>    루디아는 자주장사로서 포목점을 차리고 가게로 찾아오는 손님만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분명 천을 들고 이 집 저 집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 저의 집에도 옷감을 들고 찾아오는 단골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p><p>이 집 저 집 찾아다니다 보니 얼마나 몸이 피곤하고 나른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14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 지라' 는 말씀으로 보아 루디아는 습관적인 열심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의 신앙인이 아니고 행 17:11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그런 신실하고 열정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루디아는 바울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복음의 말씀을 조금도 거절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100%순종하여 말씀대로 사는 여인이었습니다.</p><p><br />          Ⅲ. 온 가족이 구원함을 받은 루디아(15절)</p><p>    <br />       1. 가족들에게도 신앙의 영향을 미치는 여인이었습니다.(16:31)</p><p>     바울이 빌립보 지역에  처음 선교할 당시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루디아 자신이 예수 믿는다는 일도 기적이지만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이 침례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은 더 놀랄만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루디아의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p><p>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까?...<br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br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가 서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란 위에 서서는 안됩니다. 밑에 설 때 가능한 것입니다. <br />그리고 서로 책임지는 가정입니다. "내 탓이오!"를 잘하는 가정.... "내가 잘못했습니다" "미안하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br />또 한 가지는.... 함께 예수 믿고, 한 교회를 다녀야 합니다. <br />개성을 존중한답시고.... 아버지는 불교, 아내는 기독교, 큰아들은 천주교, 딸은 회교, 며느리는 일본천리교 사위는 파룬궁.... 이건 망하는 집안입니다. </p><p>제가 잘 아는 여 집사님 한 분 중에 '한 순자'라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 집사님은 건어물 가게를 하시면서 또 밤늦게까지 가게 일을 돌아 보시면서도 새벽예배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을 다해 섬기시는 신실한 집사님 이십니다. 그러다보니 남편도 예수 잘 믿고  안수집사(장로)가 되었고 남편의 형님도 덩달아 예수님을 잘 믿어 형제가 한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가정에서 세분의 목사가 나와서 한 분은 목양 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고 한 분은 미국이민 목회하고 있고 또 한 분은 서울 모교회의 부목사로 있습니다.</p><p>이렇듯 한 여인의 뜨거운 신앙으로 인해 온 가족이 예수 믿고 여러 명의 목사가 나왔듯이 오늘 여러분들 중에는 혼자 외롭게 신앙생활 하시면서 남 모르는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고 계시지만 끝내 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자신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예수 믿고 침례 받는 역사가 나타나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       2. 루디아의 가정이 빌립보 지역에 첫 교회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p><p>     루디아는 바울의 말씀을 듣고... 그녀는 물론 그의 온 집안 식구들이 전부 침례를 받고 주께 헌신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가의 예배 처소를 루디아의 집으로 옮겨... 자기 집에서 사도 바울과 전도단 일행들이 먹고 자며...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자기 집을 개방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첫번째 교회로... 루디아의 가정을 중심으로 한....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p><p>루디아는 옷감을 팔면서 그동안 사귀어 두었던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열심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집에 머물고 있는 전도단 일행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였습니다. 날마다 모이는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서.... 바울과 실라는 더 담대히 도시 속에까지 직접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는데... 그만 로마 군병에게 붙잡혀 빌립보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p><p>바울과 실라가 잡힌 것은 사람들의 이성을 심히 소란케 하며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이유였습니다(행16:20～21). 그래서 저들은 바울과 실라를 옥에 가두고 옷을 찢으며 매로 치는 고통을 주었습니다.</p><p>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양을 하는데... 밤중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며 매어졌던 착고들이 다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p><p>그 이후에, 사도 바울과 실라는 정식으로 영접과 보호를 받으며 감옥에서 출감하게 되었고 또 다시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잠시 머물며.... 아픈 상처를 치료받고... 남아 있던 디모데의 누나들과 함께 담소를 나눈 후 이들은 계속해서 유럽 전도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p><p>    루디아는 자신과 온 가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 처소로 제공하므로 유럽 마게도니아 지역에 처음 세워진 빌립보 교회가 되었습니다. </p><p>지금도 많은 목사님들이 개척할 때 어떤 신실한 가정의 성도들을 만나 그곳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교회를 이루었다는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p><p>우리는 비록 내 가정을 내어놓아 교회를 개척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온 성도가 한마음이 되어 교회건축을 완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기를 바랍니다.</p><p><br />       Ⅳ. 사도들을 자신의 집에 강권하여 대접한 루디아(15절)</p><p>    루디아는 자주 장사하는 여인이었지만 주님의 말씀과 같이 주님이 보내주신 주의 종을 대접하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p><p>       1. 사랑이 있는 믿음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고전 16:14)</p><p>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을 정성을 다해 대접했듯이 '루디아'도 믿음 안에서 바울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대접했습니다. 루디아는 작지만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이므로 거저 나누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돕는 게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당연한 요구입니다. </p><p>서울 이화여대를 졸업한 크리스챤들의 주부모임이 루디아 여전도회인데 이 루디아 여전도회 역시 대형집회를 하면서도 일절 돈 한푼 받지 않고 침식을 제공하며 매년 1차례씩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p><p>저는 이번 달이 (2월 달) 친교의 달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 못해도 자주 심방하며 음식 좀 얻어먹으려고 합니다. 병원 밥 먹느냐고 영양보충도 제대로 못했는데 한번 멋지게 차려보시고 저와 아내를 불러주신다면 사양은 안 하겠습니다. 이렇듯 루디아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종들을 대접하였습니다. </p><p>       2. 주의 종을 귀히 여겼습니다.(살전5:13)</p><p>    주님의 신실한 종들은 대접받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심정이 되어(막10:45)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하며 대접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루디아와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받아드리고 수고하는 주의 종들을 기쁜 마음으로 즐겨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여전도 회원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54:15 +0900</dc:date>
</item>


<item>
<title>여 집사 뵈뵈</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9</link>
<description><![CDATA[<p> ▣ 여 집사 뵈뵈 ▣<br />                       롬 16:1-16,2003.07.16. 늘찬양교회 <br />                         (<a href="http://www.everpraise.or.kr">http://www.everpraise.or.kr</a>)  </p><p> </p><p>      얼마 전 영국의 20대 처녀가 혼자서 요트를 타고 대서양 바다를 90일 동안 항해를 하여 매스컴에 톱 뉴스가 된 적이 있는가 하면 이번에는 여자 프로골프 선수인 애니카 소렌스탐이 남자부 경기인 LPGA 투어에 참석하여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그것은 건강한 남자도 해 내기 힘든 일들을 연약한 힘을 가진 여자가 거뜬히 해 냈기 때문입니다. </p><p>그런데 요즈음 운동이나 일반 직장에도 남녀의 구별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육, 해, 공군 사관학교에도 여 생도들이 입소하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자 축구, 여자 레슬링, 여자 권투 등 다양한 스포츠에도 여성파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p><p>이러한 여성의 파워는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여 성도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합니다. 심지어 교회가 살아 있느냐? 죽어있느냐?를 쉽게 판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그 교회의 여전도회가 살아 있느냐? 죽어있느냐?를 보면 될 정도로 여 성도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p><p>그러므로 오늘 공부하려는 여 집사 ‘뵈뵈’에 대한 이야기는 늘찬양교회의 여전도회가 영적으로 한 차원 더 성장하는데 많은 도전과 교훈을 주게 될 것입니다.</p><p><br />             Ⅰ. 신약시대의 여성들 </p><p><br />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 여성의 지위는 지금보다 훨씬 못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남성의 재산이나 소유물로 간주되었던 사고 방식이 신약 시대에 들어 와서 다소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여성은 남성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는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 의 숫자를 셀 때에  여자는 그 숫자에 끼지를 못했습니다. 그 한 예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5천명의 사람들을 먹였을 때에도 여자와 아이들은 그 숫자에서 제외되었습니다.  </p><p>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의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또 내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또 당대에 살았던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글 중에 그가 다른 철학자들과 '여자도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자를 사람으로 간주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동물과 같은 하나의 소유물로 볼 것인가?'하는 것이 당시의 여성에 대한 관점이었습니다. </p><p>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로마서 16장 1절부터 여 집사 ‘뵈뵈’의 이름을 거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16절까지 무려 11명의 여자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 등장 인물 중 3분의 1을 해당하는 것으로서 가히 충격적이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여성의 인권이 신장된 시대나, 또 교회 안에 여성 성도가 월등히 많은 시대에, 그리고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많은 역할과 일을 감당하고 있는 시대에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됩니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가 형편없었던 시대에 여성이 이렇게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입니다.<br /> <br />본문 1절에서 16절에서 나오는 여자의 이름들을 한 번 찾아보십시다. 누가 나옵니까?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루포의 어머니, 율리와와 그 자매입니다. 바울은 이 이름들 앞에 다음과 같은 별명을 붙였습니다. '나의 보호자', '나의 동역자', '많이 수고한 사람',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람',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사람',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사람' '나의 어머니' 등입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이러한 별명을 붙이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별명에 합당한 수고와 봉사를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p><p>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열심히, 그리고 넓게 전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여성의 헌신과 수고가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성의 헌신과 수고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여성의 헌신과 수고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는 여성의 권리와 이익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성이 이렇게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여성들의 활약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활동과 인권이 보장된 남성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p><p><br />               Ⅱ. 여 집사 뵈뵈 </p><p><br />특별히 바울은 로마서 16장을 시작하면서 오늘의 주인공 ‘뵈뵈’라는 여 집사를 문안 인사 첫머리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롬16장 1절과 2절에 “겐그레아 교회의 충실한 일군으로”, “나와 함께 동역자 된 자로”,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로”, 또 “모든 필요를 때를 따라 공급해준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뵈뵈’를 맞이하는 로마 성도들에게 “너희는 주안에서 합당한 성도의 예절로 뵈뵈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바울에게 있어 ‘뵈뵈’는 충성스러운 일군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여 집사 ‘뵈뵈’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p><p>첫째로, ‘뵈뵈’라는 여성의 이름이 남자의 이름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독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미혼의 독신 봉사자였음을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여성을 말할 때는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라고 지칭한 것처럼 어느 누구의 아내, 누이, 어머니로 연결시켜 소개하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을 소개할 때, 누구의 아내, 어느 분의 딸, 어느 분의 며느리, 누구의 어머니로 소개하고 있듯이 말입니다.</p><p>둘째로,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가 공식적으로 임명한 어떤 직분자 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로마서 16장1절에서 뵈뵈를 소개할 때, 처음으로 교회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바이블'이라는 영어판 성서에는 '겐그레아 교회의 여 부제(집사),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소개합니다.'라고 써 있는 것으로 보아 뵈뵈가 교회로부터 어떤 공적 책임을 위임받았으며, 이 책임은 적어도 후대 교회의 직분 중 집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p><p>셋째로, ‘뵈뵈’는 바울을 위시한 여러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뒷바라지를 해주고 물질적 후원까지 아끼지 아니하였던 인물로 교회 공동체로부터 '영접' '도움'을 받는 것이 로마교회로부터 당연시되었기에 바울은 롬16장 2절에 뵈뵈를 도와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물질적 후원자]</p><p>넷째로, ‘뵈뵈’의 가장 큰 사역이 로마서를 몸에 지니고 로마로 잡입하여 크리스천들에게 바울의 서신을 전달해 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 전달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신학자들간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 문화원 출간의 '성서 대사전'과 '예루살렘 바이블'을 보면 로마서의 집필 장소가 겐그레아 교회의 여신도 [뵈뵈]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p><p>이렇듯 뵈뵈는 미혼의 독신 여성으로 겐그레아 교회의 여 집사로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바울의 서신을 쓰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 물질적 후원은 물론 자신이 직접 로마서를 들고 그 험하고 힘든 뱃길 여행을 통해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여 준 전달자라는 사실입니다.</p><p><br />                  Ⅲ. ‘뵈뵈’의 사역</p><p><br />             1.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p><p>      겐그레아는 지금의 그리스 남단인 아가야 지방에 있는 항구 도시로서 고린도에서 약 2.4㎞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아주 가까운 도시입니다. 뵈뵈는 고린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에서 중요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디아코노스’란 일꾼의 지칭은 집사의 직분을 가진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어진 낱말로 개혁성경에 일꾼으로 번역되었지만 집사로 바뀌어야 합니다.</p><p>그렇다면 뵈뵈가 왜 집사가 되었을까요? 겐그레아 교회에 남자 집사가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남자 집사는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뵈를 여 집사로 세운 이유는 아주 특별한 사명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쓴 편지를 로마에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p><p>듣기에 따라서는 "편지 하나 전달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 그러나 인쇄술과 종이가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이 편지를 전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분량을 한 번 따져 볼까요? 로마서 전장 16장을 파피루스라는 갈대 종이에 쓰면 대단한 분량이 됩니다. 갈대 종이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이와는 질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나쁩니다. 또 매우 두껍습니다. 그리고 제본술이 발달되지 않아 오늘날처럼 책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긴 갈대 종이 위에 글을 쓰고 둘둘 두루마리로 만들었습니다. 로마서를 쓴 두루마리는 아마도 봇짐으로 두, 세 짐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p><p>오늘날처럼 교통이나 숙박 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편지를 먼 곳에 사는 사람에게 보내는 일은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중도에 여러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렸습니다. 바다로 약 한 달, 육로로 또 한 달, 그래서 아마도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갈려면 두 달 정도가 걸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중요한 편지를 보내는데 있어서 특별히 헌신 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거기다가 박해가 심한 상태에서 여자는 그런 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가기에 유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소에 신뢰하고 있던 충성된 일꾼인 뵈뵈에게 이 일을 맡겼습니다. 그녀는 이 일을 잘 해냈습니다. 위대한 여성의 힘이었습니다.</p><p>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성 신자들의 위치와 역할을 매우 큽니다. 늘찬양교회에서의 여전도회의 역할은 너무나도 크고 중요합니다. 교회출석과 기도 그리고 봉사에 있어서 여성의 힘은 탁월합니다. 남자는 힘이 있고 강렬하지만 끈질기고 간절함에 있어서는 여자보다 못합니다. 여자는 성격적으로도 감정이 풍부하고 여리고 세밀하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거나 어렵게 만드는 일이 적습니다. </p><p>또 교회의 출석과 전도하는 일도 여성분들이 더 뜨겁게 잘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전도를 많이 한 사람들을 전도 왕으로 뽑았는데 모두 16명이 뽑혔습니다. 이 중 13명이 여자였고 나머지 3명이 남자였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전도를 많이 한 사람도 주안 장로 교회 안강자라는 여자 집사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한국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켰던 주역이 겉으로 보면 남자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p><p>사랑하는 여전도회 여러분! 여러분의 능력과 힘을 과소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능력과 힘은 대단합니다. 그것을 사장하고 있지 마십시오.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그래서 주님과 교회를 섬기십시오. 위대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p><p>             2. 나와 함께 동역된 자(자매)</p><p>바울은 그녀를 '우리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특정 여인을 가리켜 '자매'라는 표현을 한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 인들에게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형제', '자매'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뵈뵈를 가리켜 '우리 자매'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녀에게 특별한 사랑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녀를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은 그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겐그리아 교회에서 보여 준 수고와 봉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뒤에서 헌신적으로 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보살펴 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혈연 관계보다 더 깊은 형제와 자매의 우애를 느끼게 됩니다.</p><p>사실 피로 맺어진 관계도 아닌 사람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신자들의 특권입니다. 물론 입으로만 건성으로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르고 실제 속마음은 남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를 가족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만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12:13). 우리는 한 지체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p><p>특별히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뵈뵈를 추천할 때에 “우리 자매(姉妹)”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마치 자기 여동생을 추천하는 심정으로 두 가지를 부탁하였습니다. 첫째는 그녀를 그리스도 인으로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할 것과 둘째로 무엇이든지 그녀가 필요로 하거나 소용되는 것을 도와 주라는 것이었습니다.(2절) </p><p>그런데 로마 교회는 바울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로마에 가 본 적이 있어 로마 교인들과 교제를 나눈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에 뵈뵈를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p><p>아울러 로마 교회 성도들 역시 바울의 부탁을 사도의 말로 기쁘게 받아드려 비록 이름도 잘 모르고 만나 본 적도 없는 낯선 사람이지만 뵈뵈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숙식을 제공하며 필요한 것을 정성껏 도와 주었습니다. 비록 시간과 물질과 정성이 뒤따르는 일이지만 한 형제․자매로 받아드려 뵈뵈를 환영했고 도와준 것입니다.</p><p>이 얼마나 아름다운 형제․자매의 관계입니까?<br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로마교회가 뵈뵈를 한 형제․ 자매로 생각한 것처럼 우리 서로를 한 형제와 자매로 생각하면서 늘찬양교회를 성장시켜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뜻이며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기도 합니다.</p><p>             3.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   </p><p>바울은 그녀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보호자'라는 헬라말 '프로스타티스'는 당시 '외국인에 대한 법적 대리인'라는 의미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시민권이 없고 경제력이 약한 이방인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또 이 말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법률적 조력자나 물질적 후원자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뵈뵈는 바울과 그의 일행을 개인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후원함으로 큰 도움을 준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br /> </p><p>군대에 가면 '후견인'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는 신병이 들어오면 선임 고참 한 사람이 신병의 후견인이 되어 그를 도와주며 보살펴 주는 제도입니다. 실제 이 제도가 군대에서 잘 지켜지고 있지는 않지만 좋은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이를 적용한 멘토링 제자훈련이 교회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신입교우에게 멘토를 한사람씩 붙여 신앙이 자립하여 성장하기까지 돌보는 일을 하도록 돌보는 사역이 멘토링 사역입니다.</p><p>바울과 그 일행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을 다녔습니다. 한 군데 오래 정착하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에배소에서 3년을 있었던 것이 제일 긴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항상 낯선 이국과 타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문화와 풍습이 다른 곳을 옮겨 다니며 사는 일은 말처럼 낭만적이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복음을 전하는 그에게 유대인들은 적대심을 품고 바울을 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잠자리와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그를 도와주고 보호해주고 후원해 주는 사람이 항상 필요했습니다. 이 훌륭한 일을 뵈뵈가 감당했습니다.</p><p>뵈뵈는 아마도 상당한 사회적인 지위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뵈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물질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바울과 그 일행이 필요하고 소용되는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필요한 경비를 부담했습니다. 교통 수단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펐던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하거나 소용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낌없이 제공하였습니다. </p><p>뵈뵈는 바울과 복음과 교회에 있어서 영적인 보배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성공적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여인의 헌신과 감동적인 뒤 바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 선교에 있어서 바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바울을 도와주었던 뵈뵈와 같은 조력자가 항상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있었기에 바울이 복음을 그렇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바울을 도와 준 신실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br /> <br />우리는 빌립보 교회의 자주 장사 루디아를 압니다. 루디아는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는 부유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울이 전하여 준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온 집으로 더불어 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그 일행은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며 환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하여 모이게 시작하였습니다. 후에 루디아의 집을 시작으로 빌립보 교회의 기초가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의 유럽 선교가 바로 이 빌립보 교회를 처음으로 하여 출발하게 됩니다. 후에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를 지속적으로 후원합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의 일꾼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헌금을 보내주면서 그를 위로합니다. 루디아의 미덕은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습니다. </p><p>예수님께서도 사역을 하실 때 항상 여인들이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도왔습니다. 이 여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였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제공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벌써 이 때부터 여전도회가 조직되어 복음 사역의 큰 일을 감당해 냈습니다. 사실 이 여인들이 그들을 섬기며 돌보지 않았더라면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먹을 것을 준비해 주고, 빨래를 해 주고, 남자들이 보통 잊거나 모르고 지나가는 것들을 하나, 하나 챙겨 주고 하는 것 등이 사소한 일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순조롭게 되지 않으면 일이 잘 진행되지를 않습니다. 여자들이 뒤에서 도왔기 때문에 남자들이 복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p><p>어디 이 분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다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포함한 4명의 여자들은 최후까지 남아 있으면서 운명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넣으려 무덤으로 먼저 간 사람도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목격한 최초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인은 노동자가 일년 벌이에 해당하는 아주 값비싼 향유를 사서 예수님에게 부어 장례를 준비하였습니다. 안나라는 여 선지자는 과부가 된지 84년 간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주를 섬기다 아기 예수를 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최초로 유대인들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해 전했습니다. 이들이 다 여자였습니다.</p><p>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여인들은 남자들이 감히 생각도 못하는 일들을 해냈습니다. 남자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대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거뜬히 해 냈습니다. 남자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헌신과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 있으면서도 인내와 온유함으로 견디었습니다. 이러한 여인들의 봉사와 희생과 인내와 사랑이 기독교가 든든하게 설 수 있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p><p>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충성되고 신실한 여성 신자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헌신과 사랑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따듯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있기에 교회에는 훈훈한 사랑이 넘칩니다. 이런 여성들이 많이 있는 교회는 참으로 복된 교회이며 이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귀하여 여기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며 아름답고 소문난 좋은 교회가 됩니다. </p><p>          <br />                Ⅳ. 뵈뵈를 통한 영적 교훈</p><p><br />마지막으로 뵈뵈를 통한 영적 교훈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p><p>첫째: 우리는 뵈뵈를 통해 초대교회 여 성도들의 활약상을 능히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남자 집사 님들과 동직(同職)에 서서 교회를 돌보고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음은 물론 죽음의 위험까지 무릎 쓰고 직접 편지를 들고 로마까지 여행한 뵈뵈 집사처럼 늘찬양교회 여 성도들과 여자 집사 님들은 연약한 여자라는 핑계를 대지말고 끝까지 주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죽도록 충성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p><p>둘째: 뵈뵈를 한 형제 자매로 여겨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로마 성도들의 모습을 본받아 여러분들도 목회자를 비롯한 하나님의 일군들을 한 식구처럼 잘 대접하고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늘 찬양교회가 큰 교회가 되려면 남을 잘 공경하고 대접하며 섬기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p><p>셋째: 사명이 기적을 낳습니다. 맨 처음부터 뵈뵈가 큰 사명자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단순한 바울과 형제들의 보호자요, 물질적 후원자였는데 그것이 더욱 커서 복음을 로마에까지 전달할 수 있는 전달자의 사명까지 감당케 된 것입니다. </p><p>그러므로 처음부터 큰 일을 하려다 상처 당하기보다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목사님의 생각과 뜻을 잘 살펴서 매사에 순종하여 나가므로 늘 찬양교회가 더욱 커지고 성장하여 뵈뵈와 같은 좋은 여 집사 님들을 많이 배출함은 물론 해외 선교사까지 파송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늘찬양교회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49:15 +0900</dc:date>
</item>


<item>
<title>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8</link>
<description><![CDATA[<p>▣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 <br />                     행 24:24-27,2003.07.30.늘찬양교회<br />                        (<a href="http://www.everpraise.or.kr">http://www.everpraise.or.kr</a>) </p><p> </p><p>     구약의 가장 악독한 여인을 꼽는다면 당연히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을 손꼽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가장 악독한 여인을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그녀는 바로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을 살펴보면 우연찮게도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배역한 악독한 여인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남편을 도와주고 사랑해야 할 아내가 오히려 남편을 이용하여 악을 도모하는 일에 앞장서므로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들의 남편이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라는 사실입니다. 넷째로, 이세벨은 엘리야 선지자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하였으며, 드루실라는 사도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도록 감옥에 보내었습니다. 다섯째로, 이들의 마지막 죽음이 비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세벨은 창에서 떨어져 죽으므로 굶주린 개들이 와서 그 시체를 다 먹어 치웠으며, 드루실라는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 속에 매몰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p><p>  <br />                 Ⅰ. 드루실라는 어떤 여인인가?</p><p>     여기서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드루실라」는 어떤 여인이었는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드루실라(Drusille)는 드루시시의 애칭으로 '이슬에 젖은'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녀는 교회를 최초로 핍박했던 유대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로서 다른 자매들 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A.D 44년 6C말 되던 해에 부친에 의해 동부 소아시아에 위치한 코마게에(Commagene)태자 에비파네스라는 사람과 약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비파네스가 유대교의 입교를 거부하므로 결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그의 아내 아그립파 Ⅱ세가 수리아의 작은 국가인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스(Azizus)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1년, 그녀가 16세 되던 해에 노예 태생인 벨릭스의 유혹에 빠져 다시 재혼을 하였으며, 그 후 로마 식민지 총독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때, 벨릭스는 드루실라의 아름다운 미모에 빠져 아토모스(Atoms)라고 불리는 구브로 마술사의 도움을 얻어 남편 아지스를 떠나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수차에 걸쳐 설득한 결과 결혼에 성공한 것입니다. 결국, 드루실라는 벨릭스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드루실라는 유대 왕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로써 굉장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벨릭스의 유혹을 받아 그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p><p>이렇듯 ‘드루실라’는 미모의 여인으로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 번씩이나 결혼을 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자신에 대한 불만을 타인에게 무력적으로 보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내면 속에 담겨져 있는 자신의 열등감을 잘못 전이 시킨 것입니다. </p><p>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행복한 결혼의 요소가 결코 외부에 의한 것보다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아름다움에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p><p>           <br />                Ⅱ. 드루실라와 사도 바울과의 만남</p><p>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가이사랴에 있을 때(행 23:22-23)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 40여명의 음모를 바울의 생질(甥姪)이 알아차리고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매복하여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위기상황을 알렸습니다. </p><p>이에 바울은 한 백부장에게 청하여 “나의 생질을 천부장에게 면대케 하라 저가 중요한 말을 할 것이다.”고 보고함에 천부장과 생질과의 면담이 성사되었고 천부장은 생질의 증언을 통하여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유대인 40여명이 바울을  죽이려고 길에서 매복하고 있다이다.”(행23:21)는 사실을 알고 치안의 책임을 맡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에게 안전하게 보내어 정식재판을 받게 하고자 한적한 시간인 밤 9시경에 보병 2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槍軍) 이백 명을 호위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리는 편지를 써서 총독 벨릭스에게 보내었습니다. </p><p>그리하여 사도 바울과 총독 벨릭스 와의 만남이 성사되게 되었으며 바울은 그를 송사한 유대인들이 오기까지 닷새 동안 안전하게 가이사랴에 은신할 수 있었습니다.</p><p>닷새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더둘로라는 한 변사(辯士)를 데리고 와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고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p><p>“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染病)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魁首)라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 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행24:5-8)</p><p>이에 대하여 바울은 행 24:10-21까지에 기록된 말씀처럼 변론을 하게 됩니다.</p><p>'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가지 열 이틀밖에 못되었고, 나는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거나, 회당과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한 적이 없습니다. 나 역시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하나님과 사람과 내 양심에 대하여 조금도 거리낌없이 전하기를 힘쓸 뿐, 어떤 결례나 소동을 일으킨 적이 전혀 없습니다.'</p><p>벨릭스는 사도바울에게서 어떠한 잘못도 찾을 수 없는고로 자신에게 재판을 위임한 천부장 ‘루시아’를 불러 그의 증언을 청취한 후에 바울을 처결하기로 하고 감옥에 임시 구류시켜 두었습니다.</p><p>수일 후에 벨릭스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그의 아내와 더욱더 자세히 듣고자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의 믿는 도리에 대하여 듣게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바울과 벨릭스 그리고그의 아내 드루실라와의 만남이 성사되게 된 것입니다.</p><p>바울은 이 두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義)」와 「절제(節制」에 대하여 그리고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강론(講論)하였습니다. </p><p>이때 벨릭스 와 드루실라의 반응은 25절에 있는 대로 복음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저들은 과거의 음탕하고 잘못된 일로 인하여 마음에 큰 찔림을 받게되었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마음으로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p><p>한번도 아니고 수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의와 절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회개의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바울에게서 한 푼의 돈도 받을 수 없게되자...... 이들은 감옥에서 바울은 석방시키는 것을 보류하고 2년 동안이나 바울을 계속해서 감옥에 수감시켜놓았습니다. </p><p>성경은 말합니다. <br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p><p>사랑하는 성도 여러분!<br />복음의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br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언제 울려 퍼질지 모릅니다. <br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br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하였습니다.<br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br />우는 사자 마귀가 삼킬 자를 찾고자 두루 찾아다니고 있는 위기의 때입니다.<br />이때에 우리가 깨어 하나님을 찾고 찾을 때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덧입을 수가 있습니다. <br />지금이 곧 회개와 헌신의 결단을 할 때인 것을 믿고 아직까지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시지 못한 분은 이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br />특별히 이 여름 휴가철에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갖다가 이틀 간 내린 집중폭우로 인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br />한 시도 마음을 놓을 때가 없습니다.  <br />저와 여러분 중 누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 앞에 설 지 모릅니다. <br />그때에 우리는 부끄러움 없는 자로 설 수 있도록 주님 안에 바른 믿음을 가지고 <br />생명 안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p><p>                Ⅲ. 드루실라의 잘못과 죽음</p><p>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낱말에 관심을 갖고자 합니다. 그것은 행 24:22에 나오는 '벨릭스가 이 도(道)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한 것입니다. 벨릭스는 로마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유대인들보다 더 많이 더 자세히 알고 있었을까요? </p><p>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 ‘드루실라’ 로 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드루실라’가 유대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드루실라’는 성경에 대해서도 익히 여러 부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되는 벨릭스에게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였기에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행24:22)한 것입니다. </p><p>그러나 드루실라는 바울을 죽이려는 40명의 유대인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br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으로만 알뿐 행함이 없었습니다.</p><p>성경은 말합니다.<br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1:23)<br />그렇다면 살아있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br />살아있는 생명은 움직이는 것처럼 살아있는 믿음은 움직입니다.  <br />기생 라합을 아십니까?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며 창기였습니다. <br />그러나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정탐꾼을 살려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녀의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br />이렇듯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 될 때 그 믿음은 온전한 것이 됩니다.<br />그런데 드루실라는 남편의 권력을 이용하여 바울을 감옥에서 석방시켜 자유롭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힘과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활용하지 않았습니다.<br />오히려 남편의 권력을 이용하여 바울로부터 물질을 취하려고 만 애썼던 모습은 죽음 믿음의 대표적인 믿음입니다.</p><p>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여 물질에 지배를 당하고 쾌락에 지배를 당하고 환경에 지배 당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p><p>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움켜잡고 아까운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고 이제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을 드러내놓고 전하며 봉사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p><p>또 한가지 여기서 관심을 갖고 싶은 것은 만일 벨릭스가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 동석치 않고 벨릭스 혼자였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p><p>아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드림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도 석방시켜주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벨릭스의 구원의 여정에 드루실라가 방해자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p><p>드루실라의 단점은 세 번의 결혼의 과정 속에서 얻어진 불안감과 열등감입니다. 그리고 낙심감입니다. 드루실라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혼의 축복과 마음의 평안히 참 행복인 것을 깨달을 수 있었건만 아직도 세상에 대한 부귀영화와 쾌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보니까 ......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복음과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 하기보다는 물질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p><p>우리는 종종 예수 안 믿던 남편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교회를 다니고 부인보다 더 열심히 충성하려고 할 때 괜한 트집과 불평을 터뜨려 남편이 교회생활과 믿음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 같은 경우는 교회와 세상간에 두발을 담그고 문화적인 신앙생활을 해오던 아내에게 남편의 커다란 회개의 대변화는 오히려 자신에게 신앙적 삶의 부담이 되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입니다.</p><p>우리는 어설프게 예수님을 믿어서는 확실한 구원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평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두 부부가 함께 주안에서 확실하게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도 힘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한 가족이 한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기쁨은 드려 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적부요의 행복감입니다. </p><p>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p><p>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의 불 회개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파동 되어지고 그 파동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드루실라가 총독의 아내라는 위치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큰 유익을 얻음은 물론 복음의 판도도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않으므로 사도 바울을 죽게 하였고 복음의 빛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p><p>드루실라는 이 사건 이후에도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회개할 기회가 있었건만 끝까지 회개치 않으므로 결국 그녀는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때 용암에 묻혀 죽었고 벨릭스와 두루실라 사이에 난 아들 [아그립바]도 죽었습니다.</p><p>한 사람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모든 가족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 비근한 예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죄와 죽음이 들어 왔고 둘째 사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들어 왔습니다. </p><p>우리는 벨릭스와 드루실라와 같은 실수와 오류를 범하지 말고 이 시간 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므로 “이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내 가정과 이 나라가 변화되게 하소서</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41:54 +0900</dc:date>
</item>


<item>
<title>로데의 외침</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7</link>
<description><![CDATA[<p> ♣ 로데의 외침 ♣<br />                       행12:1-17,2003.09.10.늘찬양교회<br />                        (<a href="http://www.everpraise.or.kr">http://www.everpraise.or.kr</a>)  <br />   <br /> </p><p><br />       오늘은 마가의 모친 마리아의 집에서 여종으로 일하던 '로데'라는 여인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자 합니다. '로데'라는 이름은 '장미꽃'이라는 의미로 이 여인은 비록 남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는 천한 하녀였지만 그 이름의 뜻대로 마치 커피숍 탁자 위에 올려진 예쁜  장미꽃 한 송이가 그 커피숍의 분위기를 우아하게 만들어 주듯이 제자들에게 있어 이 여인은 장미꽃과 같은 화사한 웃음과 봉사와 헌신으로 말미암아 큰 위로와 힘이 되었으며 또 '로데'여인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낙심 중에 있던 제자들이 기쁨과 소망을 되찾아 다시금 복음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여인이었습니다. </p><p>도전 받기는 로데 여인처럼 우리들이 가서 머무는 곳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그런 변화와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p><p> </p><p>                     Ⅰ. 역사적 배경</p><p><br />           1. 헤롯의 박해</p><p>      오늘 본문 행12장1-4절에 보면 「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그것도 부족하여 믿는 여러 사람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까지 붙잡아다 옥에 가두었던 그런 사악한 왕 헤롯의 모습에 대하여 나옵니다.」</p><p>본문에 나오는 헤롯 왕은 아그립바 1세로서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볼로’(Aristobul<br />us)의 아들입니다. 헤롯 왕은 유대와 사마리아 영토를 지배하면서 그의 조부 헤롯 대왕이 차지하였던 영토를 재탈환하였으나 많은 유대인들은 그의 조부 헤롯 대왕이 전에 유대인들에게 여러 악행들을 행하였으므로 그의 가문을 전적으로 미워하며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아그립바는 유대 땅을 지배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자 맨처음 바른 정치를 펼쳐나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정적인 실수는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다수의 유대인이 원하면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대중의 호감을 얻기 위해 조부 헤롯왕처럼 악행을 저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p><p>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기독교인들의 수가 날마다 증가해 가는 것을 보며 두려워한 나머지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헤롯 왕을 시켜 기독교인들을 옥에 가두고 매질을 하므로 복음을 전달치 못하게 하는 그런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야고보가 최초의 순교자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까지 죽이고자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게 된 것입니다.</p><p>          2. 베드로의 극적인 탈출</p><p>     본문 행12장 6-11절에 보면 헤롯 아그립바의 공개 재판 전날 밤에 아주 극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주의 사자'가 사도 베드로의 감옥에 나타나서 잠자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웠고 베드로가 몸을 움직이자 그를 묶어 두었던 쇠사슬이 손목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이어서 천사는 베드로에게 “ 신발과 옷을 입고 나를 따라오너라” 지시하였고, 다음에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앞서 인도하였습니다.</p><p>그러나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잠에 취해있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참 인줄도 모르고 자신이 현재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천사는 감옥 안쪽 입구에 있는 두 파수꾼 사이를 지나서 큰 철문 가까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자동적으로 열렸고 천사는 감옥으로부터 한 모퉁이를 지나서 성밖으로 베드로가 나오게 되자 천사는 베드로의 곁을 슬그머니 떠나가 버렸습니다.</p><p>성밖으로 나와서야 온전한 정신이 든 베드로는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드렸습니다.(행12:11)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빨리 피신할 곳을 생각하다. 예루살렘에 모여 힘있게 기도하던 장소인 마가의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급히 마가의 어머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가의 집에 도착해보니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p><p>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지도자가 어려움을 당하자 온 교회 성도들이 합심하여 뜨겁게 기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새벽녘까지 베드로의 안전을 위하여 철야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 교회 성도가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것은 아주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능력이며 사랑입니다. </p><p><br />       <br />              Ⅱ. 마가 요한의 모친 마리아의 집</p><p><br />         제자들은 베드로가 문 밖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 ① 베드로의 무사 석방을 위하여 ② 무서운 고문과 채찍 속에서도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고 용감하게 하나님의 군사로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③ 이 같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침체되지 않고 더욱 불같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br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헤롯의 핍박과 죽임 속에서도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기도할 수 있다는 장소가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p><p>이같이 귀한 장소는 행 2장에 나오는 성령의 오순절 역사가 임한 마가의 다락방으로 성도들 속에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이곳에 모여 하나님께 뜨겁게 부르짖으며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p><p>저는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만일 이들에게 마가의 모친 마리아의 집이 아주 비좁거나 없었다면 120명이나 되는 성도들이 어디에서 모여 그렇게 뜨겁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p><p>과거 제 아내가 한 달에 두 번 평택, 안성, 송탄 안중지역 사모모임인 영성 사모회 모임을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장소가 평택 공설운동장 옆에 있는 감리교회 모 권사님 댁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이가 어려서 아이를 데리고 그곳까지 혼자 걸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제가 차로 태워 주다보니 그 집의 외부 내부 구조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2층 단독 주택으로 크고 넓어서 더욱이 이웃집과 조금 떨어져 있어서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찬양을 해도 조금도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물질도 좀 있어 사모님들께 무료로 식사까지 제공해 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늘 찬양교회 성도 님들도 이런 권사님의 가정처럼 물질의 축복도 많이 받아 여전도회모임이나 각종 기도회, 집단 상담 또는 교회 갖가지 행사 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큰 집 들을 가진 성도님들이 많이 채워지기를 기도해봅니다.</p><p>제가 명지대 C. C. C.시절에도 학교 가까운 곳에 다락방 하나를 얻어 놓아서 그곳에서 학생들이 모여 밤새 리트릿을 하며 찬양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깊이 공부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의 신앙의 최고점이 바로 이 때에 이 같은 다락방 모임을 통해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다락방 그러면 그때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지나갑니다.</p><p>그래서 부족하나마 이 어려운 때에 늘 찬양교회 1층을 24시간 개방해놓고 ‘고민나누기’의 밤을 가지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p><p> </p><p>                    Ⅲ. ‘로데’의 충성스러운 모습</p><p><br />       그러나 이처럼 귀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숨겨진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주인공 ‘로데’의 이야기입니다. </p><p>사도행전 2장에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성도의 수가 120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기까지 많은 기간동안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집에 모여 일심으로 성령 받기를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p><p>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한 두 사람도 아닌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집에서 기숙하고 있었을 때 이 많은 사람들을 누가 수발하였겠는가? 라는 의문점입니다. </p><p>이 귀한 일을 여종 '로데'가 맡아서 감당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녀로서 유일하게 '로데'라는 여인의 이름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로데라는 여종은 대단한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시중 들고 대접함에 있어서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한 사실 없이 온 몸과 마음을 다 받쳐 충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녀의 믿음 또한 대단하였다는 것입니다.</p><p>분명 '로데'는 보기 드문 일꾼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천사의 도움을 받아 베드로가 감옥에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마가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데는 피곤을 핑계삼아 자지 않고 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문을 두드릴 때에 가장 먼저 그 소리를 듣고 얼른 달려나가 '누구세요?'하고 물었고 그 대답자가 베드로임을 금방 알아차리고 너무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미처 문도 열어 드리지 못한 채 안으로 뛰어 들어가 기도하고 있는 무리에게 '지금 밖에 베드로 선생님이 와 계십니다.'하고 보고를 했습니다. 이는 로데의 믿음과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를 한 눈에 증거 해주는 단적인 실례입니다.   </p><p>더 놀라운 사실은 ‘로데’가 방안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베드로 선생님이 지금 문 밖에 서 계십니다.”(행12:14) 할 때에 제자들은 로데가 ' 미쳤다'고 조롱하며 무시했습니다. 그녀가 너무 기쁜 나머지 너무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던 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전개되고 있습니다.</p><p>우리 속에서도 기도는 뜨겁게 하지만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실제 생활이 남에게 본이 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자성해보며 되돌아봐야 할 문제들입니다.</p><p>'로데'는 미쳤다고 조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분명하게 힘을 주어 '사도 베드로가 문밖에 오신 것은 사실입니다.'고 재차 아뢰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또다시 '그렇다면 그것은 그의 천사일 것이다.'(행12:15)고 대답을 했습니다. </p><p>이런 우여곡절이 진행되는 동안 사도 베드로는 문을 힘차게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정말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급히 방문을 열고 뛰어 나가 대문을 열어 보자 정말 사도 베드로가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돌아온 베드로를 얼싸안고 감격하며 기뻐하였으며 자신들의 기도를 속히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p><p><br />         Ⅳ. ‘로데’가 주는 영적 교훈</p><p>      마지막으로 우리는 로데가 던져주는 영적 교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p><p>첫째: '로데'는 하나님 앞에 충실하고 신실한 하녀였다는 사실입니다. <br />120명의 성도들을 대접했고 또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어 성도들이 모여 기도 할 때도 이들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늦은 시간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 여종으로서의 맡은 일에 한마디의 불평과 원망도 없이 충성스럽게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로데의 모습을 통해 내 앞에 숱한 역경과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며 믿음의 길을 굳건히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둘째: '로데'는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br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그 수많은 제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음에도 사도 베드로가 와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또 로데의 보고에도 끝까지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제자들과 비교해볼 때 로데는 밖에서 들리는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한눈에 그가 사도 베드로였다는 것을 알 정도로 믿음이 뛰어 났습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의 출현을 알렸습니다. 우리 속에 어떤 시련과 핍박이 다가와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후회하거나 뒤돌아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p><p>셋째: 지도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br />베드로가 감옥에서 천사의 도움을 받아 출옥할 수 있었던 축복의 비결은 바로 눈물 뿌려 기도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br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br />“기도는 역사를 일으킵니다.”<br />“기도는 영적 해방과 기쁨입니다.”​</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38:08 +0900</dc:date>
</item>


<item>
<title>도르가의 작은 봉사</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6</link>
<description><![CDATA[<p>♣ 도르가의 작은 봉사 ♣ <br />                      행 9:36-43,2003.08.20.늘찬양교회</p><p> </p><p>     대해라고도 불리는 지중해 아름다운 바닷가에 욥바라고 하는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이 욥바는 인천항과 같은 큰 항구 도시로서 옛 부터 무역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다 보니 외국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욥바에 ‘도르가’ 헬라어로는 `다비다`라고 불리우는 여성이 살고 있었습니다. </p><p>‘도르가’라는 이름은 날렵하고 우아한 자태를 가진'영양(=산양)' 혹은 '사슴' `노루‘의 뜻으로서 아마 도르가는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나누어주는 즉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났던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바느질을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그 바느질 솜씨만큼이나 아름답게 자신의 생을 수놓아 간 사람입니다. 그가 사랑하고 함께 했던 여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세상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남편을 일찍 잃은 과부들이었습니다. 다비다는 이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베풀었습니다. </p><p>영화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아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오드리 햅번’이라는 영화배우가 있습니다. 그녀는 가냘픈 몸매와 둥근 눈 그리고 밝은 미소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주목을 한 눈에 받았으며, 아울러 세상에서 많은 부(富)와 명성(名聲)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배고파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p><p>훗날 그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드리 햅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을 만난 것은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가 아니고 수없이 막을 올리고 내렸던 그녀의 영화에서가 아니라 메마르고 굶주린 땅 아프리카에서였다." </p><p>어느 적막한 밤 그녀는 오랜 투병 끝에 고요히 눈을 감았지만 그녀는 짧은 글을 우리의 가슴에 써주고 갔습니다. "당신에게는 또 다른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도와 주기 위한 것입니다." </p><p>욥바에 살던 다비다가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p><p><br />                Ⅰ. 여제자 도르가의 삶 </p><p>    오늘 본문은 " 도르가라 선행(善行)과 구제(救濟)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절)라는 말씀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행실부터 소개하고 있습니다. </p><p>도르가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도르가는 수많은 신약의 여성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 제자(헬라어 : 마쎄트리아)로 불리기까지 하면서(행 9:36) 선행과 구제에 힘썼던 여인입니다.</p><p>도르가라는 이 여인이 결혼을 했다가 과부가 됐는지 아니면 전혀 시집을 안가고 순수한 처녀로 일평생 주를 위해 헌신한 여자인지는 성경에 분명한 기록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이 말하기를 이 `도르가`라는 여인은 아예 처음부터 "처녀로서 한평생을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기로 헌신하겠다고 서원한 여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p><p>그렇다면, 이 여인이 남편도 없이 혼자서 삶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였을 텐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행 9:39에 보니까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 "의 말씀을 살펴 볼 때, 도르가라는 여인은 `삵 바느질` 일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도르가`라는 여인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삵 바느질을 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어서 `삵 바느질`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p><p>실제로 ‘도르가’는 가난한 자들과 과부들을 위해 손수 애정 어린 손길로 헤어진 옷이 있으면 꿰매어 주고 또 여기 저기 다니면서 천을 얻어다 옷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예쁜 옷을 손수 만들어서 입혀 주었습니다. 또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몸에 꼭 맞게 옷을 고쳐 주기도 하였습니다. </p><p>`도르가`가 만들어준 옷은 그 어떤 일류 재봉사와 제단사가 만든 옷보다도 더 솜씨가 훌륭하고 섬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옷을 선물 받은 사람들은 도르가에 대하여 무척 고맙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도르가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해요.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고 말씀하셨거든요"라고 하며,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p><p>도르가의 이 아름다운 행동을 본받아 도르가가 섬기고 있는 교회 성도들도 뜻을 같이하여 도르가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욥바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한 사랑의 옷 나누어주기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어 이제 전 세계적으로 "도르가 협회"라는 자선단체가 조직되어 이 도르가 협회를 중심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구제품과 구호품 등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 요사이 번지고 있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과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도, 그리고 바자회 모임도 처음 도르가의 헌신으로부터 출발되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p><p> </p><p>             Ⅱ. 교회 봉사와 헌신 </p><p>      우리는 오늘 도르가라는 여인을 통해 크게 도전 받고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 어떤 특정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도르가라는 여인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닙니다. 또 재주도 많아 여러 일을 하는 사람은 더 더욱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그가 삶의 한 수단으로 여겼던 「삵 바느질 일」그것을 가지고 조금도 남에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조그만 일부터 찾아 사랑의 봉사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 혹시 커튼이 찢어져서 꿰매고 고칠 부분은 없는가, 살펴보다가 그것이 교회안에서 교회 밖으로 더 나아가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이 옮겨갔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 사람들을 섬긴 것입니다. </p><p>처음부터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br />어떤 사람은 내가 돈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낼 때까지 잠시 교회를 쉬겠다 또는 그 때 가서야 십일조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가진 것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없지만 만져지는 것이 없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그만 일부터 아주 작은 일부터 다시 말하면 겨자씨 만한 감사로부터 시작해야 큰 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br /> <br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를 교회 봉사는 많은 물질이 있어야 하고 실력과 학식이 있어야 하며, 아는 것도 많아야 하며, 은사도 많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므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말입니다.<br /> <br />믿음이 부족한 어떤 사람은 “나는 교회에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나가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교회 봉사는 피아노 반주나 안내, 헌금 이런 종류의 봉사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교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기도 또는 청소 나아가 한 영혼을 위하여 전도하는 것 등 진짜 해야 할 교회 봉사와 헌신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고 있습니다. </p><p>이제 우리는 겨자씨 만한 작은 봉사로부터 시작하여 열심 있는 기도와 전도 그리고 십자가 순교의 길까지 이루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2003년 반환점을 돌아 새롭게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부터 다시금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서 주님의 일에 헌신하리라 충성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의 작은 일에부터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더 큰 은사와 능력과 물질의 축복을 통하여 더 많은 것들을 맡겨주실 것입니다.</p><p>늘찬양교회의 성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작은 일부터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br /> <br />도르가는 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② 삯 바느질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몸서 실천하였으며, ③ 바울은 그녀를 여 제자로 인정하였듯이 소유, 지위, 명예, 권세보다 남을 더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신앙과 인격을 갖춘 섬김의 사람이었으며, ④ 예수 증인의 삶을 살았던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p><p><br />                  Ⅲ. 도르가의 죽음과 부활 </p><p>     그런데 갑자기 [도르가]라는 여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너무 열심히 봉사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은 것입니다. 더욱이 그녀의 시체를 거둘 만한 친척이 없었기에 교회는 더더욱 난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르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온 마을에 알려지자 평소에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많은 친구와 과부들이 몰려와 그녀의 시체를 닦아주었고 또 입관까지 시켜 주었습니다(행 9:37). </p><p>그리고, 교회는 욥바에서 두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룻다에 베드로 사도가 머무르고 있음을 알고서는 빨리 사람을 보내어 모셔오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베드로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행 5:15에 베드로의 그림자가 덮었을 때, 병든 자가 나았다는 사실과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다는(행 3:1-10) 사실들이 그 증거입니다. </p><p>베드로 사도는 곧 도착하여 죽은 시체를 뉘어 놓은 다락방에 올라가 울고 있는 여자들로부터 도르가라는 여인이 살아 생전 행한 선행과 구제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낱낱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실증적으로 다 내어 보이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p><p>그러자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40절)고 명하매 죽었던 다비다(도르가)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습니다.<br /> <br />이 기적은 도르가 여인으로부터 인간적인 사랑과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은 여인들이 그제야 살아 계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주 앞에 많이 돌아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다비다, 즉, 도르가 여인은 베드로를 통해 다시금 생명을 얻었으며 또 그때 이후로 거저 얻은 생명을 더더욱 주님을 위해 바늘을 쥐고 이 땅의 가난하고, 배고프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옷을 지어 주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복음 전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전하였을 것입니다. </p><p><br />결론의 말씀 </p><p>도르가의 작은 헌신과 섬김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께 돌아오게 하였고 또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렸던 도르가! 그 첫 출발이 작은 삯바느질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작은 일, 큰일 가리지 말고 주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교회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희망과 능력을 주셔서 이 시대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p><p>작은 봉사에 대한 이야기 한 마디를 하고 말씀을 마친다. <br />■ 어느 시골의 총각 선생님이 출근길에 시냇물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징검다리를 잘못 밟아 신발과 바지가 물에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때마침 서울에서 올라오신 어머니께서 집에 머물고 계셨다. 그가 어머니에게 되돌아온 이유를 말씀드리자 어머니가 물었다． <br />"네가 밟았던 잘못 놓인 돌은 바로 놓았느냐?",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무슨 선생이 되겠다고 그러느냐? 얼른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리고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p><p>어머니의 말씀이 조금 야속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몇 백 번 생각해도 옳은 말씀이었다. 그는 얼른 가서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다. 이 후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늘 돌을 바로 놓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돌을 바로 놓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다른 사람도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리고 내가 한 실수를 다른 사람도 하지 않도록 작은 징검다리를 제대로 놓도록 하자. <br />​</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32:16 +0900</dc:date>
</item>


<item>
<title>불행을 자초한 삽비라</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5</link>
<description><![CDATA[<p>♣ 불행을 자초한 삽비라 ♣<br />                      행 4:32-5:11,2003.07.23.늘찬양교회 <br />                         (<a href="http://www.everpraise.or.kr">http://www.everpraise.or.kr</a>)  </p><p> </p><p>       여러분 중에 하나님 앞에 서원기도를 드려보신 분이 있으십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때라든지 또는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자원하여 서원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p><p>2001년 1월 9일자 국민일보에 나온 간증입니다. 경북 영덕의 ‘구계교회’에 출석하는 안수집사인 김상태씨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창립된지 21년이나 되었지만, 출석교인이 5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늘 교회재정이 부족하여 교회를 수리하지 못하고 지내다보니 조금만 바람이 불어와도 건물이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빗물이 성전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p><p>김 집사는 이 낡은 교회를 바라보며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교회를 수리하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를 축복해주세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그는 성탄절을 앞두고 목사님께 찾아와 "목사님, 내가 이번에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제발 고기를 많이 잡아서 성전을 수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하고 특별기도를 부탁했습니다. </p><p>드디어 이 집사는 성탄절 전날에 엄청난 ‘방어’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기들이 집사의 배 주위에만 몰려들었습니다. 얼마나 고기를 많이 잡았는지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선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강구 수협 위판장에서 경매로 4억원 이상의 막대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마을 노인들도 깜짝 놀라며 한 사람의 그물에서 방어가 이렇게 많이 잡히기는 정치망 어장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놀라워했습니다. </p><p>그는 이 돈으로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리고 성전도 말끔히 수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달만에 다시 길이가 5m나 되는 밍크 고래를 잡은 것입니다. 보통 어장 그물에 간혹 돌고래가 걸리기는 해도 대형 밍크 고래가 걸리기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크기가 그 정도로 큰고래라면 얼마든지 그물을 끊고 도망갈 법도 한데, 그 고래는 항구로 끌고 와서 건져 올릴 때까지 신기할 정도로 얌전했다고 합니다. 집사님은 이 고래를 팔아 5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p><p>사실 이 집사는 IMF이후 부채를 지고 어장을 폐쇄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수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결과 이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교회는 새 성전을 지으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br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서원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꼭 들어주십니다.  </p><p>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남편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서원 이야기는 전혀 내용이 틀림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밭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였는데 이 같은 결정이 흔히들 일어나는 ’심령부흥대성회‘에서 감동을 받고 즉흥적으로 서원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들 앞에 변질된 물질을 드리다가 두 사람 다 성령을 속인 죄로 죽음을 맞고 무덤에 묻히는 부끄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br />  <br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서원과 죽음을 통하여 무엇이 참 신앙이며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참된 섬김인가?를 깨닫는 귀한 시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p><p><br />          Ⅰ. 성령의 감동 중에 재산을 헌납하기로 결단한 부부</p><p>      초대 교회는 큰 역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이 가르침과 성령의 능력을 받아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도에 힘썼으며, 또 성령의 능력으로 갖가지 이적과 기사도 많이 행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일은 믿는 자들이 서로 마음을 합하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교제하며 나누어 쓰므로 사랑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난하거나 부자가 따로 없었습니다. 가진 자 들은 가진 자 대로, 없는 자 들은 없는 자 대로 자기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 앞에 봉헌을 하였습니다. 어느 누구하나 내 것은 소중한 것이므로 팔 수 없다고 우기는 사람도 없었고..... 재산을 팔아 교회에다 헌납하라....는 권고도 없었건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앞을 다투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집과 밭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이것을 가지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초대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p><p>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전에서 매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도 같이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규율이나 제재도 없이 그저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깊은 영적 사귐을 갖는데 있어서 물질이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커다란 장애가 됨을 스스로 느끼고 자원하여 집과 밭을 팔아서 공동으로 소유하는 일을 결행하게 된 것입니다.</p><p>그 중에서도 [바나바]라고도 하는 [요셉]이라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밭을 팔아 생긴 돈을 가지고 와 사도들 앞에 봉헌했습니다. 이것을 바라본 다른 성도들은 요셉이 보여준 위대한 행동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본을 따라 많은 성도들이 앞을 다투어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이 같은 물질의 헌신과 봉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초대교회는 놀라웁게 성장해 갔으며 아울러 갖가지 놀라운 이적들도 일어났습니다. 이런 와중 속에 누가 먼저 그 아이디어를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이 대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나바와 다른 사람에게 뒤지기가 싫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이들의 결정은 ‘상호 합의’하에 신중하게 이루어진 결정이었습니다.</p><p>         Ⅱ. 사단의 훼방을 받아 서원을 변개한 부부</p><p>       그러나 이 같은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단 하나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사단]이라는 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후 사단은 더욱 더 그 기세를 강하게 하여 지금까지 믿는 자들을 유혹하여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사단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로 뭉쳐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고자 궁리하던 끝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이 부부가 가난한 자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얻고 싶은 명예욕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사단은 이들의 마음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p><p>그리하여 사단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영적인 면보다 육적인 면을 더 관심 있게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유혹한 첫 번째 미끼는 그들이 나이가 들은 후 일을 할 수도 없을 때 수중에 돈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가 자네들을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두려움과 걱정을 심어 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맞는 말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단의 유혹을 따라 그들의 땅을 팔아 생긴 돈의 일부는 자신들의 노후를 위해 따로 몰래 감추어 놓고 다 내어놓은 체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을 바나바 만큼 높이 추켜세워 주지 않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p><p>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나무 숲에 숨어 있어도 다 아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받은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땅 판 돈의 일부를 숨기고 땅값의 전부라고 말하는 아나니아의 속임수를 미리 알고 먼저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0)고 꾸중하였습니다. 이때, 아나니아는 사도들 앞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죽을죄를 졌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하고 용서를 구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 아나니아는 끝까지 모르는 척 하고 속였습니다. </p><p>베드로는 계속해서 아나니아에게 설명합니다. '땅을 팔든 안 팔든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네것이다. 그리고 땅을 판 후에도 헌금을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하면 얼마를 할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다 네 마음 대로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땅값의 전부인양 내어놓았느냐? 이 같은 속임수는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다. 고로 너는 제 죄 값을 받을 지어다.' 하매 아나니아는 곧 죽어 넘어졌습니다. 아나니아가 죽은 것은 헌물이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부정직함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속였으며, 그 다음에는 가난한 자들을 속여 사람의 인기와 칭찬을 독차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p><p>오늘 우리에게도 이 같은 일이 이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내면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고도 목사님과 성도들에게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양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 같은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저울질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대가로 그의 생명이 지불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며(히 12:29), 우리의 앉고 일어서심과 머리털의 수까지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히 4:13)</p><p>       <br />            Ⅲ. 남편을 쫓아 죽는 삽비라</p><p>      예루살렘은 그렇게 큰 마을이 아닙니다. 평택시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집을 나간 남편이 3시간이나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궁금했습니다. 더욱이 지금 남편은 밭을 팔아 생긴 거액의 돈을 쥐고 사도들을 만나러 갔는데 혹시나 도중에 강도를 만나 큰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옆길 술집으로 샜는가! 싶어 궁금증과 기다림을 이기지 못하고 삽비라는 남편을 찾아 사도들이 머물고 있는 성전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p><p>성전 문을 여니 그곳에는 베드로와 함께 다른 사도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삽비라는 남편보다는 그 돈의 행방에 더 관심이 있었던지라 들어서자 마자 삽비라는 '저의 남편이 땅 판돈을 사도들께 가져 왔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사도 베드로는 다시 일어나 삽비라를 향해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삽비라는 사도 베드로의 질문의 심각성과 그 방안의 분위기를 얼른 알아차리고 '아닙니다. 사실은 땅 판값의 일부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할 텐데, 남편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하다가 죽은 줄도 모르고 제 남편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조금도 서스럼없이'예! 이뿐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남편을 장사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남편의 뒤를 쫓아 삽비라도 죽었습니다.</p><p>이를 본 초대교회 성도들과 주위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죄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사전에 모의된 죄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얼마든지 사단의 유출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또 사도 베드로의 질문 때에도 돌이켜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수 있었건만 끝까지 하나님을 속이고 사도들과 성도들을 우롱했던 것입니다.</p><p>의미있는 예화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br />   </p><p>러셀 콘웰 목사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풀 침례교회에서 시무할 때의 일입니다.<br />어느 날 저녁, 기도회를 마친 러셀 콘웰 목사는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p><p>"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기로 약속하고 그 이후로 계속 십일조 헌금의 생활을 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p><p>그러자 일곱 명의 교인이 손을 들었습니다.<br />러셀 콘웰 목사는 그들에게 간증을 하도록 시켰습니다.<br />그래서 한 사람씩 나와서 간증을 하는데, 모두들 십일조로 인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에 대해 간증하는 것이었습니다.</p><p>마지막 일곱 번째 사람의 차례가 되었습니다.<br />그런데, 머리는 희끗희끗 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부인은 간증하기를 좀 꺼리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p><p>"저는 앞서 얘기한 분들과 같은 그런 간증거리가 없습니다."</p><p>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p><p>"저는 하나님께 십일조 헌금을 드리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절약에 절약을 하면서 십일조 헌금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늙어 얼마 안 있으면 직장도 잃게 됩니다. 그저 앞으로의 살길이 막막할 뿐입니다."</p><p>부인이 이런 말을 하고 자리로 들어오자, 교인들은 모두 침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br />그리고는 어둡고 무거운 표정으로 집으로 들 돌아갔습니다.</p><p>이튿날, 러셀 콘웰 목사는 크리스찬이며 백화점의 사장인 존 워너메이커씨로부터 점심 식사 초대를 받아 그와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br />식사를 하면서 존 워너메이커 씨는 러셀 콘웰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p><p>"목사님 ! 그 동안 저희 회사에서는 사원들의 복지 시책의 일환으로 연금제도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는 오늘 25년 장기 근속자에 대한 평생 연금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좋은 일입니까 ?"</p><p>존 워너메이커 씨는 그것에 관해 계속 이야기하며 평생 연금을 받는 그 사원의 이름을 코웰 목사에게 말했주었습니다. 러셀 콘웰 목사는 그 이름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p><p>왜냐하면, 평생 연금을 받는 사람은 바로 어제 저녁 교회에서 일곱 번째로 간증한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p><p>성경은 말합니다. <br />'네가 하나님께 서원 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라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전 5:4)</p><p> </p><p>결론을 말씀드립니다.</p><p>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시고 부부로 짝지워 주신 것은 악한 일에 협력하라고 동조하라고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해서는 서로 분개하며 질투하고 선한 일,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같이 뜻을 모르고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자들은 가정 주부로서 남편의 동태와 신앙 생활을 잘 살펴 꾸짖고 일깨워 주는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p><p>오늘날처럼 물질주의가 판을 치고 세상 레져 문화와 스포츠가 발달해 있는 현 시대 속에서 남편을 지키고 가정을 세속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아내의 끊임없는 기도와 전도가 필요합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가서 남편을 전도시키지 못하였을 대, 그 죄는 나와 상관없다고 말못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아내 되는 여러분들이여! 시험에 들지 말고 깨어 각성하여 신앙 생활을 하되, 하나님께 약조한 서원이 있거들랑 그 약조한 서원은 꼭 철저히 지켜 사단이 우리 안에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p><p>아무쪼록 여러분들의 가정은 서로 신뢰하고 협조하여 아껴주는 믿음의 가정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 ​</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29:34 +0900</dc:date>
</item>


<item>
<title>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뜻 소경의 어머니</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4</link>
<description><![CDATA[<p>  ▣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뜻 소경의 어머니 ▣<br />                  요 9:1-34,2003.07.02.늘찬양교회 </p><p> </p><p>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보면 예기치 않은 여러 억울한 일들, 서운한 일들을 종종 당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상대방을 위로하며 칭찬해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을 던졌는데 불행히도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자신의 약점을 찌르는 말로, 무시하는 말로 들려졌을 때 말하는 쪽의 사람은 여간 고통스럽고 당황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상대방에서 노골적으로 그 문제를 거론해올 때 그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이런 오해를 받아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p><p>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은 나면서부터 소경인 한 청년의 어머니가 아들의 눈먼 것이 열려서 밖같 세상을 보게되어졌을 때 그 보게되어진 사실을 은폐하려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보시오'(요 9:23)한 이 말이 자신이 그 아이의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서 출교(出敎) 당할까봐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변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으로서 그것은 뭔가 뜻이 와전되었거나 잘못된 오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져서 시내 서점에 들러 요한복음 강해서를 뒤적거렸는데 90%이상이 소경의 부모가 자신이 유대교에서 출교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들에게 답변을 회피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견해에 찬성할 수가 없어서 또 다른 서적들을 뒤적이다가 성광 문화사에서 만들어낸 요한복음 강해가 저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기쁨에 용기를 얻어 ...... 소경에서 눈이 떠진 아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그 같은 기적과 은총을 행하신 분이 누구 시며, 더 나아가 깨달아진 구원의 하나님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증언하도록 유도한 훌륭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초점을 잡아 말씀을 풀어가려고 합니다.</p><p><br />                  Ⅰ. 나면서부터 소경인 청년</p><p>    본문 1절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전의 미문, 즉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에 구걸하는 소경들이 많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p><p>그런데 유독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짖굳은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아마 이렇게 질문한 이유에는 「저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만 소경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에 하소연하는 현실적인 물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도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자 만큼은 어떻게 하실 수 없을 것이다.」는 위로적 차원에 소경의 죄를 들먹인 것입니다.</p><p>제자들의 질문은 어떤 면에서 존재론적이고 깊은 신학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두 가지 허구성이 있습니다.  </p><p>하나는 이 같은 질문을 소경이나 바리새인이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먼저 한 것에서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비굴한 양심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부자나 회장 정치가 권력자들에게는 전도를 잘 하려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핑계하는 이유에는 저들의 삶이 너무나 태평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전도해도 먹이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이면에는 가진 자에 대한 미움 그리고 저들이 교회에 와서 자신들의 위치를 자랑하므로 말미암아 자신이 초라해질 그 같은 자격지심 때문에 미루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은 소경에 관한 한 책임이 없다고 핑계하려는 것입니다.</p><p>둘째는 제자들의 잘못된 정보와 관행 사고 방식으로 질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잘못된 관행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전수된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오해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34장, 민수기 14장에 보면 '아비의 악이 자손의 삼사 대까지 이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극대화해서 아버지가 잘못해 자식이 병이 들었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로써 모든 운명을 아버지의 잘못으로 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p><p>나머지는 모든 병이 죄로 인해 생기게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병을 아주 단순하게 해석합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거나 혹은 조상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병이 왔다고 간단하게 치부해 버립니다. 잘못된 관행과 지식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결국 각종 질병과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p><p>우리 주변에 실패한 사람, 병든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모두 죄 값이라면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리고 죄를 짓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악인은 눈꺼풀이 피둥피둥하다고 했습니다. 악인이 아주 건강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제자들은 잘못된 사고 방식으로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p><p>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을 운명적인 존재로 단정하지 않으시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미래에 되어질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3절)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불행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창조의 가치를 부여하는 말씀입니다.</p><p>모든 불행을 숙명적으로 해석하는 불교나 유교와 미신의 영향을 받은 한국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나던지 불구자가 되면 평생 동안 거지나 인생의 낙오자로 생을 저주하며 살아가 죽어버리는 것이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p><p>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이 자기 앞에 휘몰아 칠 때 운명으로 맡기고 생을 저주하며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고난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 고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끼면서 성공적인 인생으로 승리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어 불행한 자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에 맡겨 살도록 하지 않으시고 불행한 운명을 바꾸어 보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축복하십니다. </p><p><br />                  Ⅱ. 고침을 받은 소경 </p><p>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환자들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고침을 베풀 때마다.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때  그제야 환자에게 고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때와는 달리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3-5)는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절) 명하셨습니다.</p><p>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정의하십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셔서 사명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따르는 주의 제자들도 남녀노소 환자나 건강한자 가진 자나 없는 자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나가서 빛의 복음 생명의 복음에 대해서 증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p>하나님의 사람들은 복음전도의 사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복음을 통해 슬픔과 낙심과 절망과 패배에서 일어나 믿음 소망 사랑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 긴박성이 있어야 합니다.</p><p>나면서부터 소경인 한 사람은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과 따뜻한 사랑의 열망을 몸으로 느끼며 <br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할 때에 순종함으로 나갔습니다. 그 결과 11절에 있는 대로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매 보게 되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p><p>순종이 기적을 낳습니다. <br />우리 삶에도 복음에 대한 열망과 소망이 가득할 때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br />교회 부흥에 대한 소망과 영혼 사랑에 대한 구령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p><p><br />               Ⅲ. 바리새인과 소경 </p><p>     나면서부터 소경 된 청년이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음으로 앞을 볼 수 있게되자 그 동안 갖고 다녔던 지팡이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팡이가 없이도 똑바로 잘 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귀한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서는 “아니 이 자가 누군가, 이 사람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 그와 비슷한 형제이나 친척이겠지... ” 하며 도저히 소경이 보게 된 사실에 대하여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리새인에게 이 소경을 데리고 가서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시비를 가려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8-9절)</p><p>전에 소경이었던 이 청년을 사람들로부터 넘겨받은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당황과 초조함이 역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모습을 감추기라도 하듯 근엄하고 강압적인 어투로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하여 눈을 뜨게 되었는가? 우리에게 바로 말하라'(10절)고 그러자 이 청년은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도다'고 11절에 이에 15절에서도 똑같이 대답을 하였습니다.</p><p>소경의 답변을 듣고 난 바리새인들은 이 대답에서는 어떠한 하자(瑕疵)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요하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은 궁리 끝에 이 소경이 고침 받은 날이 거룩하게 지키는 안식일 날 행하여졌다는 것을 알고서는 이 사실을 근거로 예수라 하는 사람이 분명 하나님께로서 온 자라면 안식일을 범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안식일을 범한 것을 보니  그는 선지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하며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한 중죄인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했습니다.(요 9:16)</p><p><br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다락 위의 손수건도 밑으로 내려놓거나, 램프에 불을 켜거나, 손톱이나 수염을 깎는 일도 율법에 어긋난 것이다」 하여 안식일에는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급한 환자가 발생해 생명이 위독할 때에도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에 치료하도록 간단하게 예방조치만 할 뿐 본격적인 치료는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당장 눈을 뜨지 않아도 죽는 것은 아닌데 그것도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으니 이것은 율법을 희롱한 것이며 안식일을 범한 것이므로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한 중죄인으로 고발한 것입니다.</p><p>그리고 이 같은 중죄를 범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죄인에게 출교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출교를 받은 사람은 산헤드린으로 부터 파문 당하여 축출 당하였고,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으며, 유대인의 시민자격까지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범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든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고 따르는 자들은 모두다 출교 명령을 내렸습니다.</p><p>하지만 예수에게 출교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을 잘 아는 바리새인들은 아주 원초적으로 이 사건은 조작된 하나의 사기 사건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소경의 부모를 불러 참고인 조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또다시 소경의 부모를 회당 안으로 불러드렸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물었습니다.</p><p>                   Ⅳ. 바리새인과 부모 </p><p>  본문 1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 말에'라는 말과 '너희 아들이냐'라는 말에는 중대한 함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p><p>첫째는 '너희 말에'라는 말을 통해 「정말 예수라는 사람이 병을 고쳐준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네가 유포했느냐,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이며 만일 네 눈으로 그 장면을 보았다면 너도 안식일을 범하도록 옆에서 공조한 범인이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만일 공조자가 안되려면 오늘은 안식이니 다음에 고치시지요? 하고 청원해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했다는 것은 너희들도 같은 안식일을 범한 공범이자 중죄인이다.」라는 올무를 통해 “ 사실은 예수님에게 병 고침을 받은 사실이 없다.”는 고백을 유도하기 위한 공갈협박의 수작입니다.</p><p>둘째는 '너희 아들이냐'라는 말을 통해 어떻게 너는 부정하게도 소경된 아이를 낳았는가? 게다가 그 아이를 구걸하도록 성전 미문 앞에 방치해두었는가? 그것이 부모로서 할 도리인가? 하여 그 부모 된 자의 책임감과 자존심을 건드려 열등감을 안겨주므로, '저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나는 소경 된 아이를 아들로 둔적이 없다'는 고백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하는 질문은 부모로 하여금 이것은 사기 극이었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서 유도하는 장면인 것입니다.</p><p>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하여 소경이었던 그 청년의 부모님의 답변은 당당하게도 20절에 있는 것처럼 '이 아이는 내 아들이 분명히 맞다. 그리고 전에는 소경 된 아이였으나 지금은 소경이 아니라 사물을 볼 수 잇는 아이가 되었다.'고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p><p>부모는 비록 못난 자식이었지만 분명한 내 자식임을 떳떳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마음은 부모 된 자로서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죽일 죄를 범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부모만큼은 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앞을 못 본다고 그 동안 자라면서 얼마나 남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고 놀리움을 받았는가! 그 서러움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부모인 나마저 내 아들에게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나? 」하며 분명하게 자신의 아들이 전에는 소경이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p><p>이 여인은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분명 자신의 아들에게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말하는 것보다는 아들에게 그 대답을 돌리므로 아들에게는 자신을 깨끗하게 고쳐주신 분이 누구라는 사실과 그 분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그 분에게 절하며 그분을 따라 나설 것까지 생각하고 이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마지막 답변을 미루었습니다. </p><p>그래서 21절에 있는 대로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고 하고 아들에게 최종적인 답변을 들으라고 우회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경학자들이  설교자들이 숨겨진 어머니의 진심은 모르고 부모마저도 출교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자신만 살려고 답변의 책임을 아들에게 전가한 나쁜 부모라고 평가한 것은 잘못된 평가라고 저는 이 자리를 빌어 말하고 싶습니다.</p><p>만일 소경의 부모가 출교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있었다면 20절에서 '내 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소경도 아니었습니다. 잠깐 눈병에 걸렸던 것뿐이었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었을 것을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아들에게 답변을 넘긴 것은 그 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영접을 갖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p><p>이 같은 대답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이런 일은 전에 예수님께서도 당하셨던 일입니다.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와 예수님께 “율법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은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속셈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말과 또 놓아 주라 하면 율법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므로 둘 중에 하나는 걸릴 것이다」고 생각하여 질문했는데 그때 예수님은 답변을 하지 않고 땅에 엎드려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는 자구 추궁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돌로 치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시므로 그 위기를 쉽게 해결해나갔던 장면이 연상되어 질 것입니다. </p><p>그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2장 17절에서 22절에서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하여 상론하고는 '당신 생각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할 때에 예수님은 직접 답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한사람을 택하여 질문하셨습니다.'그 돈에 나온 형상과 그 글이 뉘것이냐?'고 질문하므로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답변 할때에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하는 우회적인 답변으로써 멋지게 바리새인들을 골탕먹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오늘 이 소경의 어머니가 한 말씀인 것입니다.</p><p><br />          Ⅴ. 예수를 증거 하는 소경의 모습</p><p>     바리새인들은 할 수 없이 전에 소경이었던 청년을 다시 불러서 재차 묻는 동안 소경 청년은 맨 처음 11절에 '예수라 하는 사람으로' 다시 말해 평범한 한 사람으로 말했는데, 17절에는 “선지자”로 고백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27절에는 '큰 스승으로' 알았으며 33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는 것을 알았으며' 마지막으로 38절에는 예수를 “인자”로 믿고 고백하며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p><p>결국 어머니의 우회적인 답변으로 말미암아 아들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 '사람'에서, '선지자'로 '큰 스승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마지막에는 예수를 “인자”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확신과 축복을 갖게 해 준 것입니다. </p><p>우리의 믿음도 이 청년과 같아야 합니다. 내가 처음 예수 믿기 전 소경이었으나 친구의 전도로 주위 사람들의 전도로 영적 소경에서는 건짐을 받았으나 은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의 앞날과 가정과 교회를 축복해주실 전능자 예수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p><p>그런데 이 사실을 전에 소경이었던 이 청년은 실로암 사건을 통하여 분명히 알게 되었고 이제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자기를 소경에서 보게 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축복이 어머니의 숨은 뜻에 있었다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p><p>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p><p>우리는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일 하고도 욕을 먹고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나오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보게된 것으로 소경의 어머니는 값진 오해와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p><p>우리도 한 사람을 구원시키고 주의 일꾼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애정의 땀방울을 뿌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를 종종 자기 집에 재우고 같이 생활하므로 예수를 증거 하는 우리의 삶을 삽시다. 그렇게 하다 상대방 부모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받고 오해를 받게된다 할지라도 훗날 시간이 지나면 그 부모님과 그 친구가 자신의 본심을 알고 기뻐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친구를 향한 사랑의 열정을 우리 주님은 아시고 백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p><p>뿐만 아니라 전도 대상자를 내가 사전에 구별하여 누구는 전도하고 누구는 전도하지 않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든지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속히 전도해야 합니다. 환경이나 사람 핑계를 되지 맙시다. </p><p>그리고 소경의 부모가 자녀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을 찬양하게 하였듯이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의 믿음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고난을 받는 것도 괜찮습니다. </p><p>요즈음 아이들이 너무 세상이 편하다 보니 예수님도 편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고난을 당하더라도 직접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신앙을 확실히 고백하고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p><p> </p><p><br />​</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24:13 +0900</dc:date>
</item>


<item>
<title>그리스도를 만난 노파 안나</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3</link>
<description><![CDATA[<p> ▣ 그리스도를 만난 노파 안나 ▣ <br />                 눅 2:36-40,2003.09.17.늘찬양교회</p><p>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p><p>      오늘은 아셀 지파의 한 사람으로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여 선지자에 대하여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br />‘안나’라는 이름의 뜻은 “은혜”로써 그녀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속에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안나’의 특징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br />첫째, 여 선지자라는 것과, 둘째는 100세 이상을 장수한 과부이었으며, 셋째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사모하며 성전에서 금식과 기도로 살다가 대망의 메시아 아기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p><p><br />             Ⅰ. 나이 많은 안나 </p><p> <br />      [안나]라는 여인을 살펴보면서 가장 인상깊게 감명을 받은 점은 그녀가 여 선지자라는 것도 아니요, 또 과부라는 점도 아니요, 또 대망의 기다림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 보았다는 점도 아닙니다. <br />‘안나’라는 여인을 통해 가장 은혜와 도전을 받은 점은 누가복음 2장 37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주를 기다리며 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할렐루야!</p><p>      저는 성도 중에 존경스럽고 부러운 성도가 있습니다. 아울러 부러운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 어떤 교회가 가장 부러운가 하면, 나이 많은 성도님들이 새벽이고 주일 낮 예배이고, 저녁 예배이든 간에 한번도 빠짐없이 각종 예배에 나와 맨 앞에 앉아서 흰머리를 숙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노인들이 가장 부럽습니다. 아울러 이런 기도의 어르신들이 많은  교회가 가장 부럽습니다. <br />이런 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먼저 목자가 겸손해질 수밖에 없으며, 또 어머니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듯 목자를 위해 끊임없는 사랑으로 기도해 주시니 목사님의 영력이 더 커질 것이며, 또 이런 어르신들이 앞자리를 딱 지키며 기도하고 있으니 젊은 사람들이 예배에 빠질 수도 없으며, 또 교인들끼리 서로 분쟁하며 불화하는 일도 웃어른들이 조용히 앉아 있으니 먼저 나서서 싸울 수도 없어 교회가 조용한 가운데 안정성 있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p><p>그런 저런 이유로 저는 어르신들을 좋아합니다.</p><p>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나’라는 여 선지자는 매우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36절에서도 기록자 누가는 특별히 '나이 매우 늙었더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안나’의 나이를 좀 살펴보고자 합니다. </p><p>그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대부분 14살-16살 정도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한 지 7년째 되는 해 남편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과부가 된지가 84년이라고 했으니까.... 결혼 연령 14살에 결혼생활 7년 그리고 과부 된지 84년의 생활을 더하면 105세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안나’라는 여인은 적어도 100살은 넘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br />‘안나’라는 여인은 오랜 세월 과부로 지내면서 자신의 삶과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남편하고 아내가 같이 살면서도 늙은 것을 한탄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안나라는 여인은 84년이라는 긴 세월을 혼자 살면서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웠을까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조금도 그녀의 삶이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거나 누추해 보이지 않고 자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p><p><br />             Ⅱ. 자랑스러운 안나의 삶</p><p>     첫째, 누구보다도 꿋꿋한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p><p>안나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흩트리지 아니하고 이렇게 오랜 세월 꿋꿋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p><p>제가 어제 학교에서 대화도중 들은 이야기인데 91세 된 노모가 64된 장애인 딸을 손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모가 91세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정정한 것은 딸을 돌보고자 하는 부모의 애정 어린 마음 때문에 건강한 것입니다. </p><p>마찬가지로 ‘안나’라는 여 선지자가 10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것은 그녀의 마음에 구세주의 강림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br />마치 이북에 고향을 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과 친척을 마나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북녘 땅을 바라보며 눈을 못 감듯 ‘안나’라는 여 선지자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한가지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소망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p><p>성경에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나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다 맞으러 나오라.”할 때에 신랑을 곧바로 맞이하고자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렸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만 준비한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마지막 날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 “신랑이다 맞으러 나오라.”(마25:6)할 때에 흠 없고 점 없는 영적 신부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예비되어 나타나고자 지금부터 푯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흔들림이 없이 귀하고 아름다울 수가 있습니다.   <br /> <br />이렇듯 ‘안나’의 소망은 전 생애를 하나님과 함께 사귀며 지내는 것을 가장 기뻐했습니다. 그러했기에 84년 동안을 홀로 성전에서 지내면서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마음의 기쁨과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p><p>이처럼 예수님께 전적인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렵거나 떨리지 않으며 오직 담대함 속에 귀한 믿음의 삶, 승리의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p><p>     둘째, 안나의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봉사의 모습 때문입니다.</p><p>안나는 누가복음 2장 36절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br />여러분! 아셀 지파가 어떤 지파인지 아십니까? 아셀 지파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로서 레아의 여종인 실바가 낳은 아셀을 중심으로 형성된 후손들이 아셀 지파입니다. 아셀지파에서는 유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셀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은 부끄러운 기록뿐입니다. 사사기 1장31-32절에서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지파로 나옵니다. 사사기 5장17절에서는 드보라가 전쟁에 승리할 때 그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던 지파입니다. 이렇듯 보잘 것 없는 지파속에서 여 선지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놀랍고도 대단한 일입니다. 이 일을 [안나]가 해 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파의 명예를 회복한 것입니다. </p><p>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봉사하며 충성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더욱이 첩의 자손이라는 불명예 속에서도, 그리고 84년이라는 긴 세월을 과부로서 있으면서도 남의 눈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끝까지 성전을 쓸고 닦던 [안나]에게 여 선지자의 사명을 주었고 또 가장 큰 소망과 축복 중에 하나인 아기 예수를 만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p><p>최용옥 집사님이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닦고 쓸고 기도할 때에 본인의 건강은 물론 자녀가 형통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흥됩니다. 그러므로 안나처럼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철저히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므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복을 받고 형통함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p><p>특별히 우리 늘 찬양교회는 성도 수에 비해 참 과부가 많은 교회입니다. 그럴수록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번 늘 찬양 교회 과부들을 위해 파이팅을 한번 외쳐 봅시다. </p><p>      셋째, 주야에 근신하며 기도하는 안나의 모습 때문입니다.</p><p>안나는 여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드러나게 한 일이 없습니다.  <br />타락과 불 신앙이 만연된 사회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통치자로, 예언자로, 사사로 부름 받아 전쟁에 나가 적을 대항하여 싸운 ‘드보라’와 같은 전적도 없습니다.(삿 4:4-14;5:7). 또 요시야 왕 때 나타난 여 선지자 '훌다'처럼 유다  나라가 우상을 많이 섬긴 죄로 인하여 국가적으로 재앙을 받게 된다고 예언한 것도 없습니다.(왕하 21:10-15)</p><p>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가 여 선지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녀가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의 때를 알고 묵묵히 참아 기다리고 있었으며, 또 성전을 떠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주야로 근신하며 기도하던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br />‘안나’는 자신이 늙었기 때문에 밖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전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나’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의 앞날과 백성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br />그러므로 나는 늙었으니까 대표 기도에서 좀 빼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새벽예배마다 철야예배마다 열심히 나와서 기도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가는 노인 집사 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p><p>우리 모두 각자의 믿음과 가정의 행복 그리고 교회의 부흥과 민족의 평안과 경제적 성장을 위하여 깨어 기도 할 때입니다. 소모성의 잦은 데모와 노사분규 우익과 좌익은 첨예한 대립, 소신 없는 국책사업과 북방정책, 주 5일제 근무 등으로 나라안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이번 14호 태풍 ‘매미’의 강타는 나라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p><p>지금 우리는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br />기도하지 않으면 곧 낙심이 다가오고 시험이 다가오고 번민이 다가오고 환란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 같은 것에 대항하여 능히 이길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4장 7절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더욱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말세입니다. 더욱이 IMF이후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는 우리로서 더욱 힘써 해야할 일은 기도입니다. 이 귀한 기도사역에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p><p>딤전 5:5에도 보면 '참 과부로서 더욱 힘써야 할 일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기도하던 ‘안나’였기에 아기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보고 안아볼 수 있었던 축복이 주어진 것입니다.</p><p>오늘날에도 늘 깨어 기도하는 자는 악한 것과 선한 것을 구별할 줄 알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눈과 귀를 열어 주십니다.</p><p><br />      마지막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p><p>안나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던 여 선지자이었기에 메시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오실 때에 한 눈에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였습니다.</p><p>우리도 이러한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br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디모데의 믿음이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에게로부터 대물림을 하였듯이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손자 손녀를 안고 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러분들이 이 성전을 떠나지 않고 또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출석하여 본을 보일 때 가능합니다. </p><p>그렇게 되기까지 우리 교회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우리 늘찬양교회가 젊고 싱싱함을 믿고 활기찬 신앙생활 뜨거운 믿음생활 은혜 넘치는 감사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p><p>우리의 소망은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기다림과 설래임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과 늘찬양교회가 「 별같이 빛나는 역사」(2003년 교회표어)가 있기를 바랍니다. <br />행복한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p><p>끝으로 한가지 더 첨부하며 결론을 내린다면,<br />‘안나’가 여 선지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드러난 일이 없지만 성전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며 성전을 닦고 쓸며 봉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여 선지자로 세우시고 또 가장 큰 축복인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하신 것처럼........</p><p>힘들고 어렵지만 뭐하나 제대로 감당할만한 은사가 없지만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며 주님을 섬길 때 여러분의 건강은 물론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이 그리고 교회가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br />그리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신랑이다 맞으러 나오라”(마25:6)할 때에 점 없고 흠 없는 영적 신부의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경건하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17:58 +0900</dc:date>
</item>


<item>
<title>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2</link>
<description><![CDATA[<p> ♣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br />                      요 7:53-8:11,2003.06.18.늘찬양교회<br />                         (<a href="http://www.everpraise.or.kr">http://www.everpraise.or.kr</a>)</p><p><br />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의 예수님,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예수님으로 소개할 때가 가장 많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할 수 있는 근거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실례로는 첫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하나밖에 없으신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십자가의 은혜요 둘째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잡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들 수가 있습니다.</p><p><br />                  Ⅰ.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p><p>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며 정죄하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변론을 벌이신 후 이들이 집으로 다 돌아가자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하여 홀로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종종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p><p>예수님은 아침이 되어 무리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시 성전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성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 앉으사 모인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개 끌들이 무자비하게 끌고 와서는 예수님 앞에 내 팽개쳤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독기와 살기가 가득했습니다.</p><p>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항변하듯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하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p><p>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돌발적인 사태에 대하여 심적인 동요(動搖)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하던 성전 뜰 안이 갑자기 소란해졌고 시끄러워졌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골탕먹이고자 아주 계획적으로 이 여인을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앞에 모세의 법을 운운하며 따지기 전에 현장범을 체포했으면 행위의 잘 잘못을 가리는 재판정으로 끌고 가야지, 거룩한 성전으로, 그것도 지금 열심히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그 시각에 여인을 개 끌듯이 끌고 온 것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며 혼내주기 보다는 예수님께 어떤 올무를 씌우기 위한 수작이었습니다. </p><p>그들의 이러한 속셈을 사도 요한도 정확히 간파하고 요한복음 8장 6절에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여인이 모세의 10계명 중 제 7계명인 ‘간음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요8:5,레20:10,신22:23-24)</p><p>이 때에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br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돌로 치라”고 말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18:22)는 용서의 말씀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거짓말쟁이가 되며, 또 “치지 말라” 명하면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므로 그 자리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쪽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곤경의 상황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계획적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p><p>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참 뜻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인간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지 이렇게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수단으로 율법을 이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양심의 거울로 자신을 돌아보아 숨겨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것은 없는가? 살펴 날마다 거룩함과 의로움과 깨끗함에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를 잘 선용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살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p><p><br />                        Ⅱ. 예수님의 반응 </p><p>     벌떼같이 몰려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송사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 순간에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비난의 화살을 예수님께 퍼부었습니다.</p><p>저 같으면 이럴 때 이렇게 대항하며 변론했을 것입니다.<br />첫째는 “죄인은 죄를 다스리는 포도청이나 재판정에 끌고 갈 일이지 왜 이곳에 와서 우리를 소란스럽게 하느냐? 이곳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거룩한 성전이다.”하며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금 저들에게 “나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일이니 빨리 돌아가라.”고 발뺌하거나 둘째는 “ 왜 너희는 이 여자가 간음하였다고 말하면서도 같이 간음한 남자는 안 데리고 오고 불공평하게 이 여인만 데려 왔느냐? 가서 간음한 상대 남자도 데리고 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불공평한 재판이므로 나는 하지 못하겠노라.”고 핑계되거나 셋째는 할 말이 없으면 삼십륙개 줄행랑치는 게 상책이라고 아예 그 자리를 피해 버렸을 것입니다.</p><p>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행동하시지 아니하시고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시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땅에다 쓰고 계셨습니다. ........ 그렇게 쓰시기를 한참 ...... 예수님은 일어서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말씀하셨습니다. </p><p>이 같은 예수님의 질문은 마태복음 7장 4절과 5절에 나오는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 나로 네 눈 속에서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p><p>예수님은 이 같은 말 한마디를 던지시고 다시금 땅에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땅에다 쓰고 계셨습니다.  ....... (어떤 사람은 이때 쓴 글이 이 여자와 간음한 사람들의 명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머)</p><p>이 때 예수님으로부터 의외의 대답을 들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어떠했을까요?</p><p><br />                         Ⅲ. 사죄의 은총 </p><p>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큰 소리로 “저 여인을 돌로 치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에 찔림을 받았던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과 예수님 밖에는 아무도 현장에 남지 않았습니다.</p><p>예수님께서는 그제야 일어나시며 혼자 남아있는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그러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0-11)고 말씀하셨습니다.</p><p>우리는 이 기사를 읽을 때마다 아주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왜! 예수님께서 제 7계명을 어긴 이 여인을 살려주셨을까? 하는 커다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 당시 길거리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힐 정도면 얼마나 그 마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부패하고 타락되어 있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더욱 이렇게 악하고 부정한 모습을 없애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이므로 죄를 범한 자의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처참한 것인가?를 알게 하여 두려움과 경각심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었건만 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살려준 것일까요? </p><p>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br />첫째: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삼상16:7) 다시 말해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인의 죄 만을 보았지 자신의 죄는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죄는 불공평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런 불공평함에 대해서 그 어떤 불평이나 변명함이 없이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 드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마9:13,막2:17)</p><p>둘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종말을 고하고 십자가를 통해 은혜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전 시대에는 율법이 주인이 되어 율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예수님이 율법의 주인이 되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율법의 심판대신 용서와 사랑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이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p><p>이것은 마치 자녀가 골목에서 야구놀이를 하다가 야구공으로 남의 집 유리창을 깨어 집주인에게 붙잡혀 호되게 꾸지람을 받고 있을 때 아이의 부모가 다른 아이들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얼른 달려가 집주인에게 유리창 값을 물어주고 사과하면 모든 묶임에서 풀려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부모로부터 “다시는 이런 좁은 골목에서 위험한 놀이나 야구놀이를 하지말고 저 넓은 운동장에 가서 하거라”는 간단한 꾸중을 듣듯이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8:10,11)</p><p><br />                    Ⅳ.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p><p>    끝으로 우리는 이 같은 말씀을 따라 우리가 본 받아야할 영적 교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p><p>첫째: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br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린 죄도 크지만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다른 여자의 생명을 매장시키고, 인격을 모독하고 자존심을 짓밟아 버린 것은 너무나 무서운 죄입니다. 남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p><p>둘째: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 이십니다.<br />죄를 범한 여인이 죽음 직전에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죄 문제와 죽음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어지고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br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재미로 인생을 사는 것도 하나의 행복입니다. 도전과 시련이 없으면 죽은 인생입니다. 비록 내 안에 커다란 근심과 염려와 불안과 죄악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참 해결자이시며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토설하므로 모든 문제에서 자유함을 받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p><p>“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p><p>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br />당시 율법에 의하면 범인을 정죄하지 않고 놓아주려면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을 정죄할 때 증인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 예수님이 이 여자를 놓아준다면 이 일로 예수님이 대신 잡혀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위험성을 마다하시고 자신이 직접 증인이 되어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p><p>오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은 것이 우리가 나중에 예수님을 잘 믿어서 예수님께 구원에 대한 어떤 보상을 드릴 수 있는 것 같아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br />이것이 복음입니다.<br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주님께 맡기기만 하면 다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p><p>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br />오늘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정죄하며 죽이려고 달려드는 군중이나,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인격을 짓밟아 버린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지는 않는지 또 죄를 짓고 흐느끼는 여인과 같지는 않는지 스스로 되돌아 봐야 합니다.</p><p>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 상황으로부터 슬그머니 도망칩니까? 아니면 양심을 짓누르고 애써 억지 변명을 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합니까?  </p><p>주님은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간음한 여인 옆에 서있기를 원합니다. 그 옆에서 "나도 죄인입니다. 이 여자 못지않게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돌을 들어 남을 치려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무릎을 꿇고 회개하십시오.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하며 상대화하지 마십시오.<br />내 속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지금이 기회입니다</p><p>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음란합니다. 성적인 범죄가 너무도 만연합니다.  조금만 틈을 주면 사정없이 침략을 당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오직 용서의 은혜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은혜를 묵상하십시오.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였음을 고백하십시오. 그 은혜가 우리를 죄 가운데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p><p>​</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13:22 +0900</dc:date>
</item>


<item>
<title>침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헤로디아의 딸</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1</link>
<description><![CDATA[<p> ♣ 침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헤로디아의 딸 ♣<br />                   막 6:17-28,2003.10.15.늘찬양교회 <br />                       <a href="http://www.everpraise.or.kr">http://www.everpraise.or.kr</a>  </p><p> </p><p>      오늘은 전대 미문의 대 살인극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살인극의 타이틀은 '침례 요한의 목을 처단하라.'입니다.  각본은 헤롯왕의 아내인 헤로디아가 썼으며, 살인 집행자는 헤롯왕 안티파스 그리고 연출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하였습니다.  이 살인극이 행하여진 장소는 헤롯 궁전에서 헤롯왕의 파티를 맞아 두 모녀의 치밀한 사전 계획과 준비아래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이루어진 전대 미문의 대 살인극입니다.</p><p><br />                     Ⅰ.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p><p>     예수님 당시 베들레헴의 모든 어린아이를 죽였던 학살의 주인공은 헤롯 대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서 그의 세 아들에게 각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안티파스' '아겔라오'' 빌립'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머니가 달랐기에 형제간이면서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p><p>오늘 15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에 '스와핑‘이라고 하는 신종섹스에 대한 보도가 나왔는데 이른바 부부가 서로 파트너를 바꿔가며 성관계를 맺는 ’부부 교환섹스‘를 말합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연락하여 만남 장소를 정하고 일차 노래방에서 부부대항 노래를 부르며 어색한 분위기를 없앤 다음 한 방에서 서로의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성관계를 가지다가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고 하는데 막상 돈을 받고 성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행법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p><p>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헤롯왕 안티파스가 이런 부도덕한 행위를 하였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원래 헤롯의 부인은 아랍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못생겼다고 이혼하고는 자기의 이복 동생이었던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을 합니다. 물론 이유는 성적인 매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헤로디아는 헤롯의 제수인 동시에 조카딸이기도 했습니다. 복잡하죠. 여하튼 이 헤롯이라는 집안은 근친상간의 역사로 얼룩진 매우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집안이었습니다. </p><p>그런데 이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계속해서 섹스 파트너를 바꾸었고 free sex life style 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궁중과 나라의 기강을 문란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누구하고 사는 지도 몰랐고 자식이 누구인 지도 모르고 살았던 부도덕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헤롯왕 안티파스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 헤로디아의 사이에 낳은 딸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살로메(Salome)〕입니다. </p><p>오늘 본문 막 6:22에서는 단순히 '헤로디아의 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요세푸스가 쓴 기록서 에는 그 딸의 이름이 〔살로메(Salome)〕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p><p>이렇듯 헤롯왕의 일가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밥먹듯 하였습니다.<br />그러다 보니 이들의 비윤리적인 행위가 사람들의 입가에 심심찮게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br />그리고 이 소문은 선지자 침례요한 에게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p><p><br />                     Ⅱ. 헤로디아의 복수심</p><p>     이 같은 죄는 레 20:21에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 하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헤롯왕 안티파스와 헤로디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며 죄악 중에 살고 있음에도 어느 누구하나 나서서 이들의 잘못을 꾸짖거나 항의도 하지 못한 채 왕의 권력과 눈치만 살피며 침묵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p><p>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침(세)례 요한에게 있어 이 일은 절대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침(세)례 요한은 자신의 죽음과 왕의 권력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서서 헤롯왕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막 6:18)고 분명히 밝히며 꾸짖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헤롯왕이 저질러온 다른 여러 범죄에 대해서도 침(세)례 요한은 거침없이 그 죄를 지적하였습니다.(눅 3:19-20)</p><p>이에 대해 헤롯왕은 침(세)례요한이 진리를 선포하며 꾸짖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로 알아듣고 달게 들으며 크게 번민도 하였으나, 그의 우유 부단한 성격과 정욕의 불사신 헤로디아의 간계로 인하여 좀처럼 헤롯 안티파스의 삶에는 아무런 육적, 영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p><p>20절 하반절, "....번민하면서도 달게 들음이더라" 그는 번민하면서도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회개하기보다는 그 번민 속에서 살았습니다. 몇 날 몇 일을 잠 못 이루고, 고민하며 고통 하면서도 돌이키려 고는 안 했습니다. 해답도 압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도 압니다.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도 도우실 것입니다. 더 이상 번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결단을 못합니다. 아니 안 합니다. 야망과 정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p><p>오늘날에도 이런 헤롯왕과 같은 사람들이 신앙인들 속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br />주일날이라고 하여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며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죄 고백과 결심으로만 끝날 뿐 교회 밖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자들과 헤롯왕의 행동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런 산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p><p>헤롯왕이 침례 요한의 징책을 받고 마음 적으로 동요를 받는 것이 역력히 보이자 옆에 있던 헤로디아는 남편을 추궁했고 그래도 안 되자 그녀는 요한을 감옥에 투옥시킬 것을 간청했습니다. 이때, 헤롯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내 헤로디아를 위하여 헤롯왕은 '침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헤로디아는 침례 요한이 감옥에 수감되자 그만큼 요한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더 커지게 됨을 마음속에 흡족히 여기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침례 요한을 죽이고자 더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p><p>우리는 여기서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과 오늘 우리가 배우는 헤로디아의 모습이 아주 극한 대조를 보이고 잇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과거 지은 죄에 대하여 똑같이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그리고 헤로디아는 침례 요한으로부터 음란한 과거에 대하여 꾸지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지난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고 솔직히 과거를 고백한 반면 헤로디아 여인은 강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무서운 복수심을 펼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로 인해 헤로디아는 근친상간의 간음죄를 넘어서 살인죄까지 범하는 악행을 하나님 앞에 저지르게 됩니다. 이렇듯 악은 교묘하게 술수를 부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이간질하며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갑니다. </p><p>이렇듯 작은 죄 하나가 큰 살인죄까지 몰고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매사에 조심하는 신앙인 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p><p><br />                      Ⅲ. 헤롯왕의 실수와 범죄</p><p>     어떻든 아내 헤로디아의 대 살인 각본도 모른 채 헤롯왕은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궁중대신들과 천부장들, 그리고 갈릴리의 귀인들과 여러 사람들을 궁전으로 초청하여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p><p>이때, 헤로디아는 남편 헤롯왕이 푼수를 잘 떨고 남에게 자신을 자랑하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흥청망청 돈을 마구 써대는 호색가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 딸 살로메로 하여금 아름답고 요염한 무희의 모습으로 분장시켜 잔치 날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도록 지시하였습니다. </p><p>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어머니의 특별 지시를 따라 남자의 성욕(性慾)을 돋구는 그런 음탕한 춤을 추므로 헤롯왕을 비롯한 모든 남성들의 정욕을 흥분시켰습니다. 헤롯왕은 거나하게 취한 몸에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광란에 깃든 현란한 춤을 추며 모든 참석자들의 박수 갈채를 받아내자 더욱 기뻤습니다. </p><p>헤롯왕 안티파스는 지금 자신의 딸 살로메가 분장을 하고 춤을 추는 지도 모르는 채 술 기분에 휘말려 호색가로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왕은 음란한 춤의 향연을 마친 여인을 향하여 '너는 참으로 나의 생일을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구나. 그래,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무엇이든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주리라. 또,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도 주리라!'(막 6:22-23)고 약속하였습니다. 드디어 헤로디아의 계획이 멋지게 성공하는 순간입니다.</p><p>아시안게임에서 이순철 선수가 마지막 10발을 10.6에 맞추므로 금메달의 영광을 안 듯 딸 살로메를 통하여 연출한 각본이 정확하게 목표물을 통과하는 순간이었습니다.<br /> <br />딸 살로메는 슬그머니 자리를 잠시 피하여 어머니 헤로디아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어머님! 지금 아버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내가 무엇을 구할까요?'(24절) 헤로디아는 딸의 물음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침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24절)고 즉각 대답하였습니다.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로부터 지시를 받고 돌아와 헤롯왕에게 이렇게 구하였습니다.</p><p>'침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니다.'(막 6:25)고 대답을 하였습니다.</p><p>살로메는 어머니의 말에다 '소반에 담아'라는 말과 '즉시', '곧'이라는 단어를 더 첨가하여 요청하므로 말미암아 헤롯왕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가슴을 쳐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왕의 위엄과 체면도 있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잔치 상 앞에서 침례 요한의 목을 베었고 그 베어진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매, 살로메는 다시 그 머리를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받쳤습니다. 그 순간, ‘살로메’와 어머니 ‘헤로디아’는 서로를 얼싸안고 승리의 기쁨과 함성을 마음껏 질렀습니다.<br />헤롯왕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권력의 남용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 잘못된 언약을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지자 침례 요한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p><p>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거나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p><p>회사의 중견간부를 전도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를 다니고는 싶은데요 목사님 교회는 못 나갑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는 우리 회사 부하 직원들이 많이 다니고 있기 때문에 과장인 제가 어떻게 창피하게 갑니까?" 하며 교회를 못나오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부하 직원과 어떻게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냐는 말이지요. 과장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내노라 하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의 자세는 어떠하겠습니까? 체면이 사람을 잡는 거예요. 체면이 침(세)례요한의 생명을 앗아갔고 한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한 것입니다. </p><p>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많이 배웠다는 이유로, 사장님의 아내라는 이유로 소리내어 기도하는 일이나 교회 식당 일이나 청소 기타 냄새나는 일들은 체면이 손상되어서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p><p>우리는 이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은혜의 강가에서 날마다 늘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p><p><br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p><p>이 시대가 얼마나 음란한 시대입니까? 얼마나 야망으로 가득찬 시대입니까? 알면서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성적욕심을 위해 불의를 행하고 더러움을 행하는 시대입니다.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그런 더러움을 자행하는 시대입니다. 적당하게 즐기고 살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취급 당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남편 외에도 아내 외에도 부적절한 관계를 즐기며 그것을 자랑하는 시대인데 그리스도인들이 회개의 복음을 붙들고 그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살므로 이런 사람들의 죽은 양심에 찔림과 도전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br />이러한 일을 하나님의 선지자 침례요한이 대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엄한 순교를 하였습니다.</p><p>살로메가 연출한 대 살인극을 통해 깨달아야 할 영적 교훈은 헤롯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영적 교만함,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인극에 뛰어든 살로메와 무서운 복수의 여인 헤로디아를 통해,'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3장)는 말씀과 ' 네 자신을 지켜 악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벧전 4:7)는 말씀이 새삼 생각납니다.</p><p>더 나아가 헤롯 안티파스처럼 완악하고 고집 세고 회개하기를 거절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하게 변화되어지지 못하는 내 모습들을 다른 친구나 이웃들이 보고, “나는 저렇게 예수 믿을 바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안 믿겠다.”고 하므로 복음 전도의 문을 막을 때, 그 사람은 헤롯 안티파스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음을 기억하고 오직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늘찬양교회 성도님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br />​</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08:49 +0900</dc:date>
</item>


<item>
<title>자기의 전부를 드린 과부</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20</link>
<description><![CDATA[<p>♧ 자기의 전부를 드린 과부 ♧ <br />                      막12:41-44, 2003,08.13.늘찬양교회<br />        <br />       <br />       성경에는 돈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 11장과 12장에서만 다섯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11:15-19에는 성전에서 매매하고 장사하고 돈 바꾸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12:1 이하에 보면 포도원을 세로 내주고 소출에 대한 세를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12:17 에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납세의 의무’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막12:40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길게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p><p>요한 웨슬레 선생은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까지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한다면 그래서 참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가장 먼저 변화되어야 할 삶의 영역 중에 하나가 돈 씀씀이에 대한 삶의 변화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p>특별히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헌금에 반영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회심, 그 사람의 구원, 그 사람의 신앙, 그 사람의 변화를 신용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헌신의 상징입니다. 헌금행위야말로 헌신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p><p><br />                Ⅰ.  예수님과 과부의 만남</p><p>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p><p>여인들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장을 봐오고 준비해온 떡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들을 갖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은 그 축제에 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월절의 본래 참뜻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의 포로 생활에서 지금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절기로 음식마련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에 본 뜻이 있기에 과부는 몇 푼 없는 돈을 먹는데 사용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기로 마음에 작정하였습니다.</p><p>그래서 과부는 곧 바로 성전으로 들어가서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미문에 마련되어진 연보 궤에 자기의 생계비 전부인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서 황급히 사라져 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헌금 궤를 마주 앉아 유심히 보고 있으셨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렀습니다.</p><p>우리는 여기서 먼저 왜 예수님께서 헌금궤에 앉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할 일 많고 바쁘신 예수님께서 연보궤에 앉아 헌금 넣는 것을 관찰하실 정도로 한가한 시간이 있었을까?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이 끝나면 몇 일 안되어 저 성전 맞은 편 갈보리 동산에서 붙잡힐 것과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한 시간들을 왜 예수님께서 연보궤 앞에 앉아서 성도들의 헌금하는 것을 관찰하는 일에 투자하셨을까?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중요한 영적 교훈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p><p>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는  연보궤마다 특별한 헌금 제목이 붙은 연보궤 13개가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헌금함은 마치 옛날 축음기(전축)처럼 입구가 나팔 모양을 한 놋쇠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화폐가 주로 동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헌금을 연보궤 입구에 넣으면 그것이 떼구르르 구르는 소리를 내며 연보궤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돈(동전)을 넣게되면 그 구르는 동전 소리도 요란하게되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관심과 존경어린 눈을 가지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보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시적인 존경과 위엄을 드러내고자 더 많은 돈을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요란한 헛기침 소리와 함께 어깨를 으쓱으쓱 거드름을 피우며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p><p>하지만 가난한 과부인 본문의 이 여 주인공은 자신의 전 생계비이었지만 고작 두 렙돈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보궤에 동전을 집어넣어도 소리가 거의 안 들렸습니다. 과부는 남이 볼까봐 창피한 마음을 가지고 얼른 몸을 되돌려 헌금궤 앞을 재빨리 빠져나가려는데 예수님께서 과부를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보이며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 전부를 모두 받친 것이다.”(막12:43-44, 공동번역)고 말씀하셨습니다. </p><p>이렇게 예수님과 과부의 첫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안타까운 마음속에 이루어졌습니다만 본문의 과부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물론 제자들에게 헌금의 바른 정신이 어떤 것임을 가르칠 수 있었던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부를 통하여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헌금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p><p><br />                  Ⅱ. 온전한 헌신의 행위</p><p>     우리는 먼저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가 본문에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나오기 바로 전에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p><p>38-40절에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외식과 거짓을 질책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上座)와 잔치의 상석(上席)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p><p>본문에서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했으며, 회당에서의 높은 자리와 잔치 자리에서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으며, 외식적으로 길게 기도하는 일에 익숙한 반면 힘없고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착취까지 하였습니다.</p><p>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모습은 이들과 아주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녀는 비록 두 렙돈, 한 고드란트라는 극히 작은 액수의 헌금을 드리고 있지만, 그녀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드린 그 헌금은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p>그리고, 이 과부의 헌금의 이야기는 단지 헌금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온전한 헌신의 정신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행위이며, 자신을 또한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성도들이 물질의 신, 맘몬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섬긴다는 것을 증거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또한, 내가 물질에 매이지 않고 맘몬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임을 증거하는 행위이며, 헌신의 정신을 담은 믿음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p><p>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br />헌신의 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인지를 살 <br />필수 있는 것입니다. <br />그러면, 하나님께 우리의 온전한 헌신을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br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까? <br /> <br />          1. 예수님께서 보고 계심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br /> <br />     우선, 은밀히 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1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은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여기서 특별히 두 가지 동사를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앉다'라는 동사와 '보다'라는 동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는 연보 궤에 대하여, 연보 궤 맞은 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앉다(카티조)'라는 동사가 특별히 분사 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일반적으로 앉으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요? 그렇습니다.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실새'라고 표현된, '보다(데오레오)'라는 동사 역시,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관찰하면서 지켜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의 형태가 미완료 시제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아직 동작이 끝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시제입니다. <br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연보 궤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지켜 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p><p>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그렇게 계속 보고 계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대로 하면, '무리가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예수께서 헌금함 맞은 편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p><p>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하게 연보 궤 맞 <br />은 편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무리들이 헌금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헌금 궤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어떤 모양으로, 어떤 모습으로 돈을 넣고 있느냐 하는 외형적인 모습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헌금을 드리는 행동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심오한 것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br />그들이 헌금을 드리는 이유나 목적,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충동, 그들 <br />의 헌금을 드리는 마음의 자세 등등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p><p>헌금을 드리는 많은 부자들이나 과부들은 예수님께서 보고 계신 것을 알지 못했지만, 주님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들이 어떻게 헌금하는 지를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자세, 동기, 이유와 목적들까지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p><p>렘17:9-10절을 다같이 찾아 읽겠습니다. <br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br />우리 예수님은 헌금 궤 앞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헌금하는 무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자들이 기억해야 할 첫 번째 교훈입니다.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헌신을 하는지 앉아서 보고 계십니다. </p><p>따라서, 주님 앞에서는 헌신을 드리는 행위나 예배 의식이나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동기와 자세와 태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코람 데오'의 삶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든, 봉사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신전 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바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신을 드리는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p><p>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br />있습니까? 지금도 우리 앞에 마주 대하여 앉아 계셔서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살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헌신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하기는, 우리의 앞에서 우리의 심장과 폐부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살아가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는 늘찬양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p><p>           2. 헌신은 양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입니다. </p><p>두 번째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교훈은 헌신은 결코 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br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헌신은 양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입니 <br />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들과 과부를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더 하나님께 많이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41절 하반절에 보면, '여러 부자가 많이 넣었다'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2절에 보면, 과부는 '두 렙돈, 한 고드란트', 다시 말해, 극히 작은 액수의 동전만 넣었을 뿐입니다. <br />그러나, 이 두 종류의 헌금에 대한 우리 주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43절 말씀입니다. <br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여러 부자가 많이 넣은 헌금보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넣은 것보다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이 더 많다고 주님께서 평가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수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p><p>어떻게 여러 부자들의 많은 헌금을 합친 것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이 많을 수 <br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에게는 '얼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헌금의 액수를 보지만, 우리 주님은 헌금에 담긴 마음가짐을 보십니다. </p><p>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헌금과 관련된 동사 '넣다'라는 단어가 모두 7번이나 등장하고 <br />있습니다. 41절에 2번, 42절에 1번, 43절에 2번, 44절에 2번 모두 7번입니다. 그런데, 그 7번의 동사가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여러 부자들과 관련해서, 다른 하나는 한 가난한 과부와 관련해서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는 모두 다 '넣다'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 보면, 분명하게 두 가지 형태로 구별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NIV를 비롯한 여러 영어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우선, 여러 부자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어진 '넣다'라는 동사는 'threw in' 또는 'gave in' 그리고 'contributed out'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던지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 가난한 과부와 관련되어 사용되어진 단어는 모두 'put in' 즉 '두다, 맡기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p><p>결론적으로 말해서, 여러 부자들은 비록 많은 양의 헌금을 드렸을지라도 그 헌금을 드리는 자세는 마치 기부하며 적선하듯 헌금 통에 던져 버렸음에 반해, 한 가난한 과부는 비록 두 렙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액수의 헌금이지만, 소중하게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p><p>다시 말해, 여러 부자들의 드린 많은 양의 헌금은 단지 기증에 불과했지만, 가난한 과부의 <br />드린 극히 적은 양의 헌금은 그녀의 전부를 드린 참된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헌신자들이 기억해야 할 두 번째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신의 양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헌신의 자세, 마음의 자세를 더 귀중히 보십니다. </p><p>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얼마나 많은 양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건축헌금과 차량헌금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많다고 자신하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수없이 드리는 공적인 예배와 수많은 교회 모임과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분의 가진 재능과 은사로 섬김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여러분이 드리는 많은 양의 헌금과 많은 시간들과 많은 재능과 은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 자세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양의 헌금과 시간과 재능을 드린다고 해도, 그것이 마치 적선이나 기부하듯 그렇게 하나님께 던져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헌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처럼 극히 적은 양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가지고 드린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희생과 헌신이 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p><p>부디 원하기는 우리 늘찬양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재능이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 마음으로 드려지는 온전한 헌신을 드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p><p>      3.  헌신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p><p>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헌신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4절을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br />여기에 보면, 왜 주님께서 여러 부자들이 드린 그 많은 헌금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보잘것없는 두 렙돈을 더 귀중히 보시는가에 대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br />그것은 바로,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풍족한 것들 중에 얼마를 드린 것에 불과하 <br />지만, 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헌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많고 또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전부를 담아 드리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헌금 액수가 적다고 해서 반드시 깊은 헌신의 표현이며, 헌금 액수가 많다고 해서 언제나 위선적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p><p>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바로 '전부'에 대한 우리의 헌신입 <br />니다. 하나님은 '부분'이 아닌 '전부'를 받으시고, '전체'로 드리는 우리들의 삶을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과부의 두 렙돈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며,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을 어떻게 모든 소유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br />따라서, 이것은 단지 헌금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br />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헌신을 온전한 헌신으로 기뻐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p><p>이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양보다는 우리가 남겨 가지 <br />고 있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러 부자들은 비록 많은 양의 헌금을 드리긴 했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풍족함을 누릴 만한 양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부를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족함 중에서 단지 일부분만을 떼어 드린 것뿐이었습니다. </p><p>하지만, 가난한 한 과부는 비록 부자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극히 적은 양의 헌 <br />금을 드렸지만, 그녀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다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이것으로 인해, 그녀의 두 렙돈을 여러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더 많게, 더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br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전부를 드린 이 온전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역사를 이루 <br />어 가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능력의 역사들이 다 이 온전한 헌신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p><p>그 중에서 대표적인 경우 한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무리를 가르치실 때에 그 수많은 무리들을 어떻게 먹이셨습니까? <br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산다고 해도 오히려 부족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어떻게 <br />채우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통해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아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이처럼, 비록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밖에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 아이가 자신의 전부를 헌신하고 바쳤을 때, 주님은 그 온전한 헌신을 통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p><p>이것이 바로, 온전한 헌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 자신의 존재 전체를 드리는 것. 이것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예수님의 교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온전한 헌신인 것입니다. </p><p>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드리기 원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br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재능의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정말 그것이 우리의 <br />전부를 드리는 것이 되고 있습니까? 아무리 많은 양의 헌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린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 내 소유로 남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p><p>그렇다고 해서, 정말 우리의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 <br />닙니다. 문제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드리든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가난한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가진 것 전부를 다 드림으로,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으로 인해, 온전히 가난하게 된 마음,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며 의지하며 신뢰하며 살아가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온전한 헌신이 아니겠습니까? </p><p>부디 원하기는, 우리 늘찬양의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부를 다 드리는 <br />온전한 헌신을 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고 그 결과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p><p>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p><p>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난한 한 과부의 드린 헌금이 어떻게 여러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많을 수 있는가? 하는 하나님 나라의 수학공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헌금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을 드리는 헌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헌신으로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p><p>이 시간 우리가 살펴본 말씀을 생각하면서 다같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우리의 삶이 '코람데오의 삶'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래서, 단순히 사람의 눈앞에서만 헌신하는 자들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br />다음으로, 우리가 드리는 많은 양의 헌금과 시간과 재능이 아니라, 그것을 드리는 우리의 <br />마음의 자세를 더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기도합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재능의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 마음으로 드려지는 온전한 헌신을 드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br />마지막으로, 부분이 아니라 전부를, 우리의 존재 전체를 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 <br />하며 살아가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온전한 헌신을 통해, 가난한 자되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며 살아가도록, 그리고, 자신의 전부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p><p> </p><p>​</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02:06 +0900</dc:date>
</item>


<item>
<title>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title>
<link>http://www.everpraise.or.kr/g5/bbs/board.php?bo_table=sermon10&amp;amp;wr_id=19</link>
<description><![CDATA[<p>♣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br />               마 20:20-28, 막 15:40-41,2003.10.22.늘찬양교회 <br />                       ( <a href="http://www.everpraise.or.kr">http://www.everpraise.or.kr</a>)  </p><p><br />      『옛날 이야기 입니다. 그러니까 40년도 더 되는 1962년 2월 10일, 여수 남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졸업식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까만 낡은 바지를 입은 중년부인이 노력상을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자 장내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했고 졸업하는 그 부인의 딸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p><p>노력상을 받은 어머니와 딸은 세 채밖에 집이 없는 외딴 섬에 살았습니다. 주민이라고는 겨우 20명 뿐인 이 섬에서는 제일 가까운 여수에 볼 일이 있어도 섬사람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p><p>어머니는 딸이 여덟 살이 되자 남편에게 딸을 육지에서 공부시키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20리나 되는 뱃길을 어떻게 다닐 수가 있겠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그 섬에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섬이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딸을 남편 몰래 육지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p><p>그로부터 6년,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20리나 되는 험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손수 노를 저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와 밭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배를 타고 딸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딸도 울고 그 어머니도 울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울었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 늦어 딸이 애처로와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울었습니다.</p><p>시계도 없는 섬에서 매일 시간을 맞춰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에 한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6년을 하루같이 오간 뱃길이 무려 3만 3천리나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졸업생과 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감격스러운 울음으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p><p>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것 중에 하나는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p><p>오늘 본문에도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나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마20:21)고 간청하는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p><p><br />                   Ⅰ. 살로메의 인물 배경</p><p>     오늘은 세베대의 아내이자(마 27:56)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인 [살로메]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살로메]란 이름의 뜻은 '샬롬'과 같은 '평화'의 뜻으로서 [살로메]는 적극적이면서도 매우 활동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살로메는 갈릴리의 여성으로서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주님께 순교의 제물로 바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기꺼이 주님의 종이 되기를 자원하여 주님이 어디를 가시든 가실 적마다 그 뒤를 따라 다니며 숨은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처형장인 골고다 십자가까지 따라가 마지막 예수님의 운명 장면까지를 끝까지 지켜본 여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안식일 날, 이른 아침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고자 무덤에 갔다가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해듣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복된 소식을 전해준 축복의 여인이기도 합니다. </p><p>그러나, [살로메]가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생애가 있었습니다. 이 파란만장한 [살로메]의 세계에 여러분을 기꺼이 초대합니다. </p><p><br />         Ⅱ. 세속적 영광을 기대했던 [살로메]</p><p><br />      세베대의 아내이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에 대한 평가는 본문 마 20:20-<br />21절 “그 때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p><p>첫째는 긍정적인 평가로 살로메는 믿음이 담대한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br />둘째는 부정적인 평가로 세속적이고 육신 적인 영광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p><p>살로메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마19:28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p><p>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열두 제자들도 보좌 위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살로메는 이 말씀을 실제 있는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그때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능욕 당하고, 채찍질 당하다가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때였습니다. </p><p>여러분이라면 이런 얘기를 들은 직후에도 과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겨나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마당에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여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겠습니까? </p><p>그런데  살로메는 마치 구약시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예비하라.”(창6:14)고 명령하셨을 때 아직 노아는 비를 보지 못하였지만 말씀 그대로 믿고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듯이 살로메는 하나님의 영광의 때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살로메는 대단한 믿음을 소유한 여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p><p>하지만 저는 여기서 일반적인 평가를 따르려고 합니다. 그 평가는 살로메가 순간적으로나마 세속적이고도, 육신 적인 영광을 구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왕]으로서 이 땅에 높은 권력과 많은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실 분으로 알고 주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다시 말해 [살로메]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p><p>그리고선 무엇인가를 청할 의향으로 예수님께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눈치를 채시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두 제자의 어머니인 살로메는 정중하게 엎드려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마 20:21)하고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 어머니가 너희를 위하여 나에게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마20:21)하고 두 제자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할 수 있나이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p><p>그때였습니다. 마침 이 장면을 보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의 대답과 행동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열두 제자를 모두 불러모으시고 가라사대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권력자들이 백성을 탄압하며내리 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들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p><p>성경에는 없지만 아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세베대의 아내[살로메]는 특히 더 낯이 뜨거워서 얼른 뒤로 도망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쭉 하다보니까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교회에서 장로나 안수집사 또는 권사 직분을 맡고 있으면 으레 자식들도 커가면서 유. 초등부 시절 때는 예수님 역이나 시 낭송을 도맡아 하다가 중. 고등부 시절에는 학생회장을, 그리고 심지어는 청년회장까지 역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p><p>물론 이들의 신앙심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좋아서 학생 회장직을 맡는다면 야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장로님의 아들과 안수 집사님의 자제 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회장직을 이어간다면 그것은 분명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p><p>우스개 소리일지 모르지만, 어떤 장로님과 집사님은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게 상당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잘 지내다가 꼭 연말이 되면 이들의 감정이 터졌습니다. 이유인 즉, 매년마다 돌아오는 성탄절 행사 때 연극배역을 갖고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자식들이 서로 예수님 역을 맡겠다고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은 굳이 예수님 역을 자신의 자녀에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p><p>어떻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연극은 끝났고 이 아이들은 이제 커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에 가서는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집사님의 아들이 장로님의 아들을 누르고 공개투표에서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것입니다. 그러자 장로는 자기를 따르는 몇 사람들을 데리고 이웃 교회로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p><p>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해서 그렇지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 권위 주위를 가져왔고 세속주의와 이기주의를 가져왔습니다. </p><p>교회 직분은 봉사직이지 권위직이 아닙니다. 집사 위에 권사고 권사 위에 장로고 장로 위에 목사가 아닙니다. 이러한 직분은 교회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봉사직이지 계급적이거나 권위적인 직분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배울 여성 인물인 살로메를 통하여 올바른 믿음 생활이 무엇인가를 본받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p><p><br />           Ⅲ.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살로메]</p><p><br />      처음에 살로메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지상의 새 왕국을 세우시고 친히 왕이 되실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 두 아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빛을 보아야 하겠다는 모성적인 열의로서 과감히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식들의 미래를 보장해 달라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p><p>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는 말씀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왔느니라'(마 20:28)는 말씀을 듣고 창피해서 돌아섰지만 그 이후 자신의 잘못된 인본주의 신앙과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회개하며 주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지고 갈 2:20에 있는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신앙 자세로 묵묵히 주님의 길을 따랐습니다.</p><p>[살로메]에 대한 특별한 내용은 업지만 이 일 이후 [살로메]의 인생관과 축복관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두 아들을 모두 다 순교자로 내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야고보는 헤롯왕 아그립파 1세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들 사도 요한은 말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치며 그 유명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p><p>살로메가 처음 요청한 세상적인 영광의 보좌는 두 아들이 얻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주님이 마셨던 고난의 잔을 순교를 통해, 함께 마실 수가 있었으며, 또 주님의 보좌 좌 우편에 앉는 영광의 축복도 하늘나라에 가서 받은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p><p>우리가 참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한가지 사실은 꼭 명심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의 최대 영광은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내가 이 땅을 마친 후 또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때 가서 받을 축복이고 지금 나의 가장 복된 영광과 축복은 고난의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p><p>그러므로 고난의 잔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특별히 예수님의 친히 보여주셨던 봉사의 잔, 섬김의 잔, 희생의 잔을 마음껏 마십시다. [살로메]는 살아 생전 이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지 그 뒤를 쫓아갔으며, 또 보이지 않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수발을 하인처럼, 종처럼 받들었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상에서 살로메는 예외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로메의 아들 요한을 지적하시며 자신의 모친이셨던 마리아를 돌보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살로메에게 보이신 마지막 증거입니다.</p><p>살로메는 이 감격과 은혜와 사랑을 갚고자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가를 찾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함이었습니다. (막16:1-2)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살로메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을 직접 마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p><p>살로메는 그리하여 부활의 소식을 열두 제자들과 주를 사랑하여 쫓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할렐루야!</p><p>결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p><p>살로메는 한때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현세적 영광을 예수님께 청탁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의 운명, 무덤에서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변치 않고 주님을 섬기며 열정적으로 주님을 쫓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막 15:10, 41). 더 나아가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살로메는 즉시 나가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눅 24:1-10). 뿐만 아니라 한 사람도 아닌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주님께 순교의 제물로 드리기까지 자녀의 신앙성숙을 도왔던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p><p>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두 아들의 영광된 모습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구하였던 모습에서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두 아들을 아낌없이 순교의 장까지 내어 주었던 그 믿음의 모습과 아울러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뜨겁게 전하는 살로메를 통하여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존귀하고 아름다우며 귀한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복된 증인의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더 나아가 살로메가 원하였던 이 땅에서의 영광을 얻지는 못했지만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p><p>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지고 푯대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에게도 주의 나라에서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는 영광의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그 날의 영광을 누리기까지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늘 찬양의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br />​</p><p> </p>]]></description>
<dc:creator>늘찬양하는삶</dc:creator>
<dc:date>Fri, 31 Oct 2014 21:00:13 +0900</dc:date>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