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장 왕 되신 우리 주께 (130장) > 통합큐티

본문 바로가기

2015.03.30[월]
140장 왕 되신 우리 주께 (130장)
찬송
성경 본문
막 11:9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묵상
유대 백성들 호산나 찬양하며 주 환영하였네
찬송요약
1절)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신 왕 되신 주를 맞아 많은 무리들 호산나 불렀네
2절) 유대 백성들 주를 맞아 종려가지 흔들며 호산나 불렀듯이 우리도 호산나 부르세
3절) 주 고난 받기 전 무리들 주 환영하며 찬양하였네 그 넓은 사랑으로 받아 주소서
찬송해설
호산나 찬송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였듯이 영광의 찬양을 부르며 주님을 환영하자는 종료주일 찬송으로 이태리 태생의 카톨릭 주교로 프로렌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가 후에는 올린스(Orleans)의 주교로 활동한 신학자이며 사회 개혁가이었던 데오돌프(Theodulph;750~821)가 작사하고, 독일 태생의 루터교 목사이며 성가대 지휘자 이었던 멜콰이어 테쉬너(M.Teschner;1584~1635)가 작곡한 것을 1861년에 윌리엄 헨리 몬크(W.H.Monk;1823~1889)가 ‘고대와 현대 찬송가’에 번역하여 실었다.
찬송프롤로그
1절 왕 되신 우리 주께 다 영광 돌리세
그 옛날 많은 무리 호산나 불렀네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시어
왕 위에 오른 주께 다 영광 돌리세

1절,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신 왕 되신 주를 맞아 많은 무리들 호산나 불렀네

찬송가 1절의 핵심은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신 왕 메시아 예수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첫머리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왜 신약성서 제일 첫머리에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었을까요? 원래 족보라고 하는 것은 한 집안의 내력입니다. 한 집안이 어떻게 이 세상의 역사 한 가운데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마다 족보가 있습니다. 저는 당악 김씨입니다. 족보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를 마태복음 첫머리에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과 관계없는 하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땅 한가운데서 벌어진 실제적인 사건임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건이 아닙니다. 족보에 나오는 이름들은 이 땅을 살다간 실제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00년 유대 땅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사건,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고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사건은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까? 우선 1절을 보십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먼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고 우상숭배 하던 집안에서 자라난 평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의 삶 자체가 대단히 의롭다든지 선한 일을 많이 했다든지 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 갔을 때 그는 자기가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얄팍한 처세술을 가졌습니다. 그것도 애굽에서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블레셋 땅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도 단지 우리와 같은 죄인이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처럼 예수 믿기 이전에는 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은 불러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는 절대로 예수 안 믿겠다고 호언장담하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악한 질병에 걸려서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문은 불교나 유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도무지 복음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들어와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사건입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가 구원받은 것만 해도 너무 놀라운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아브라함의 자손이 사단을 꺾고 온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네 씨가”, “네 씨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보십시오! 하나님은 적어도 예수님 오시기전 1,80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 자손으로 구원자가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또 본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7장 12절 이하에 보면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 이사야 11장 1절에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씩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여기서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난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면 예수님 당시는 메시야를 나타내는 하나의 관용어적인 표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오신 약속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약속하셨고, 다윗에게도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성취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보다 더 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다 죄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실수가 많았지만 다윗 역시 죄인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죄가 자기 신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죄를 숨기려고 하다가 그 남편까지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모자라고 죄 많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자라는 아브라함과 죄인인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와 허물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약해서 넘어질 때 의심이 들거나 시험에 빠졌을 때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훨씬 큽니다. 십자가에서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치료받지 못할 질병이 없고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찬송 예화
‘다 감사드리세-찬송가 66장’

찬송가 66장 ‘다 감사드리세’의 찬송을 마틴 린카르트(Martin Rinkart;1586-1649) 목사님이 1636년 작사했습니다. 이 곡을 작사했을 당시 린카르트 목사님이 독일 아이렌버그 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30년 전쟁으로 전쟁의 공포가 자신과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이 만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떤 날은 하루에 장례를 50건을 치루기도 했답니다. 가족들 가운데 세상 떠난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절망이 숨 막히도록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무려 66개의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그 중에 한 곡이 “다 감사 드리세”입니다. 슬픔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다 감사하겠다고 노래합니다. 큰 슬픔 속에서 통곡하는 이 세상이 기뻐한다고 노래합니다. 지금도 그 크신 복을 주시며 또 영원히 그 복을 주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지금 주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뒤로 하고 세상 바라보던 눈을 들어 저 하늘의 주님께 고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염려, 세상 고통, 세상의 무거운 짐 다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과의 만남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찬양은 조건과 상황을 뛰어넘습니다. 찬양할 이유가 이 세상에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오직 찬양할 이유는 한 가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찬양을 부르려면 오직 찬양할 이유가 주님께만 있어야 합니다.
관련 찬송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67장
호산나 호산나 141장
시온에 오시는 주 142장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230장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313장
오늘의 기도
영원하신 평화의 왕으로 나의 심령가운데 임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시는 주님께서 나의 몸과 생각을 다스려 주시고 허락하신 삶의 터전에서 그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시고 구원받은 백성들로 호산나 찬양을 올릴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본문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찬양큐티란?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Copyright © www.everprais.or.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