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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1[화]
141장 호산나 호산나 (132장)
찬송
성경 본문
마 2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호산나 하더라.”
찬송묵상
수많은 아이들 호산나 외치며 주 찬양하였네
찬송요약
1절) 수많은 아이들 호산나 외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즐겁게 주 찬양하였네
2절) 만왕의 왕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종려가지 흔들며 감람산 길 따랐네
3절) 전능왕 구주께 우리도 온 몸과 마음 다해 목소리 높여 호산나 부르자
찬송해설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돌아가 만왕의 왕 주 예수께 기쁜 노래 부르며 호산나 찬양하자는 종려주일 찬양으로 영국 랭카셔 태생의 여류 찬송작가로 가난과 질병 더 나아가 사고로 다리 불구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기쁨과 활력을 잃지 않았던 제네트 트릴폴(J. Threlfall;1821~1880) 여사가 작사하고 1784년 헤르쪼글(Herzogl)의 카톨릭 찬미가에 실려 있던 곡조를 발췌, 본 찬송시와 결합한 것이다. 곡조 엘라콤 ‘ELLACOMBE'은 영국 마을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찬송프롤로그
1절 호산 - 나 호산나 다 노래 부른다
수많은 아이들이 즐거운 노래로
그 품에 안으시고 복 주신 주님께
온 몸과 마음 드려 주 찬양합니다

1절, 수많은 아이들 호산나 외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즐겁게 주 찬양하였네.

찬송가 1절에서는 시온에 오시는 주 호산나 찬송하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에 대하여 마태복음 21장 15-16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5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만세를 부르며 찬양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만세소리’를 불렀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어린이들과 달랐습니다. 많은 어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된다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출세욕에 들떠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만세, 만세”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당장 출세를 바라고 명예를 바라며 영광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아마도 어른들은 그 마음속에 “아니 예수라 하는 자는 어떻게 저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영광에 사용하는가?” 분개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개 눈에는 똥만 보이듯이 말입니다. 아니면 어린아이들의 깨달음이 유치하다고 주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모습이 유치한 어린이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것에 분개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며 예수님께 노를 발하며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듣고 있다. 너희는 시 8편 2절에 나오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찬송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잘되고, 성공하고, 축제를 하고, 축하하고, 축하파티…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깊이 내려가고, 겸손하게 되고, 아주 순수해질 때, 거기서 진정한 찬송, 진정한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지금 어린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거짓 없이 그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찬양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런 순수한 찬양, 감사와 은혜의 찬양을 주님께 드려본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건강할 때, 일이 잘 될 때, 합격이나 취업이 됐을 때와 같이 기쁠 때에만 찬양했습니까? 아니면 바울과 실라처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고 억울하게 매를 맞고 그 맞은 매로 인하여 고통 속에 잠을 못 이루고 있을 때, 갑자기 다가온 마음의 평강과 기쁨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의 찬양을 기뻐 받으시고 옥터에 지진이 일어나게 해서 저들의 발목을 채웠던 착고를 풀게 하고 옥문을 열게 하고 더 나아가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 예수를 믿게 하였던 역사의 찬양을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기적과 열림의 역사가 없었다. 할지라도 고난 속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범사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을 드린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렇게 조건 없이 고난 속에서 순수하게 찬양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항상 외적인 요소를 근거로 해서 찬양하려니까? 찬양이 안 되고 노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가 그 흔한 싸구려 나귀를 타고 입성하냐? 적어도 많은 신하들과 값진 말을 타고 들어와야지...우리를 조롱하는 것이냐?”며 질책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과 실라가 한 밤중에 찬양할 때도 그 곳에 있던 간수들 중에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처럼 조롱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을 바라보며 감사 찬양하며 영광 돌릴 때에 조롱하며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순수한 찬양, 거짓 없는 찬양, 조건 없는 찬양을 어린아이들에게서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모든 자들이 이 어린아이들처럼 찬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찬양을 듣고서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자신의 품에 안아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해 주셨습니다(눅 18:16).

사도행전 2장 47절에 보시면 초대교회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핍박이 많은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풀무 불처럼 피어올랐던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상태, 더욱이 자신의 생활에도 어떤 특별한 변화가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늘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살전 5:16-18) 늘 찬양하는 삶을 살았더니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고 삶에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으며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를 중심한 찬송을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찬송으로, 조건적인 감사를 무조건적인 감사로 승화시켜 나갈 때 그것이 곧 “온 몸과 마음 드려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찬송가 1절), 또 그렇게 찬양할 때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그 품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받아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호산나” 찬양이 종려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 예화
‘찬양을 방해하는 것들’

찬송가 66장 ‘다 감사드리세’의 찬송을 마틴 린카르트(Martin Rinkart;1586-1649) 목사님이 1636년 작사했습니다. 이 곡을 작사했을 당시 린카르트 목사님이 독일 아이렌버그 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30년 전쟁으로 전쟁의 공포가 자신과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
C. S. 루이스는 찬양을 방해하는 것들을 몇 가지로 분석해 놓았다. 그 첫 번째는 부주의함이다.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짓을 간과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것은 우리가 단지 인생의 격심한 생존 경쟁 속에 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생을 흐리멍덩하게 더럽히려는 가정과 학교와 직장의 매우 타당성 있는 요구들 때문이다. 두 번째 방해 요인은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찬양하기 보다는 분석을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 찬양의 방해 요인은 탐욕이다. 우리는 "이번에도 주님이십니다."라는 말 대신에 "한번만 더"라는 파멸의 말을 하기가 쉽다. 더욱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단순히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즐기든 즐기지 않던 더 많은 즐거움을 원한다. 그러나 "한 날의 즐거움은 그날에 족하다" 루이스는 한 가지 방해 요인을 더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부심이다. 일상적인 것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에 관해 자부심을 갖기가 너무 쉽다. 특히 남을 가르치는 사람일수록 그러기가 더욱 쉽다. 자부심이 발동하면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가에 다시 한 번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찬양의 줄이 매우 쉽사리 잘리는 이유다.

<참고: 리차드 포스터/ '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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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삶의 무게에 짓눌린 나의 영혼이 위로부터 내리는 위로와 평강으로 충만케 하셔서 드리워진 그늘을 벗어버리고 소리 높여 왕 되신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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