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장 사망을 이긴 주 (152장) > 통합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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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7[화]
172장 사망을 이긴 주 (152장)
찬송
성경 본문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찬송묵상
사망권세 이기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
찬송요약
1절, 사망권세 이기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
2절, 부활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 다 전파하여라
3절, 천사도 거문고 타면서 사망을 이긴 주 찬송하네
4절, 하늘에 오른 주 온 교회와 성도위하여 늘 기도하네
찬송해설
아일랜드의 회중교회 지도자요 위대한 찬송가 작가로서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당시 아일랜드의 법관이었던 부친의 소망을 따라 법관의 길을 가야하느냐 아니면 사역자의 길을 가야하느냐 고민하던 토마스 켈리(T.Kelly;1769~1854)목사가 목회자의 길을 택한 후 이 곡을 작사하였다. 찬송 곡은 죠지 후레드릭 루트(G.F.Root;1820~1895)가 작곡하였다. 루트 박사는 수백편의 성가와 많은 칸타타 및 음악교본을 만들었으며, 1872년에 시카고 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찬송프롤로그
1절 사망을 이긴 주 교회의 머리라
죄 사함 받은 우리도 주 함께 살리라

1절, 사망권세 이기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

인간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습니다. 100년 전의 인간의 삶과 오늘날의 인간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릅니다. 그만큼 인간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우주 탐험을 비롯해서 각종 첨단 기술들이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어도, 또 세상을 뒤 흔들만한 권력을 가졌어도, 제갈공명 같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어도 결국 모두 다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두렵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그 막강한 죽음을 향해서 외치는 담대한 소리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놀라운 도전의 외침이 아닙니까? 죽음의 권세야! 한번 덤벼보라는 것입니다. 그 날카로운 창으로 한번 찔러보라는 것입니다. 결코 사망이 나를 이기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사망을 이기고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와 확신에서 사도 바울은 죽음을 향해서 이렇게 담대하게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비밀은 죽음의 속성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56절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그토록 강력하게 인간을 압제하고 지배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에게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는 것도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어떻게 해서 이 땅에 들어왔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명하셨건만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왔고 그로인하여 죽음이 임하게 되었습
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하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에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보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더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들보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열매에 유혹당하여 명령을 거스른 것입니다. 그 결과 삶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막강한 권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권능의 근거는 율법에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죄를 지은 자에게는 죽음의 형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이고,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사로잡힌 죄인들에게 한 가지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공짜입니다. 은혜는 용서입니다. 율법은 죄에 대한 형벌을 말하지만, 은혜는 그 죄의 용서와 형벌의 면제를 말합니다.

은혜의 핵심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인 인간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구원하기로 하신것입니다. 즉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면제해 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형벌의 면제가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도록 내어주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얼마나 많은 매 맞음과 곤욕과 창피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을 때 치솟는 피의 모습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음 정도의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 그 형벌을 당하셔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사 53:5).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 죽음의 권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로잡은 죽음은 대단한 승리의 잔치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창조주를 죽음에게 빼앗긴 모든 피조물들은 넋을 잃고 슬퍼하며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죽음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때려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능력은 죄와 죽음이 즉 사망의 권세가 더 이상 인간을 얽어매놀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가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는데, 죄가 떠났으니까 죽음도 떠나야지요.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그러나 이런 죄 사함의 은총과 부활의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할 때, 우리 역시 그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악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난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죽어 썩어질 인생 으로는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썩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은 거룩한 몸으로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던 것처럼 살아날 것이고, 아직 죽지 않고 있던 사람들도 썩지 않고 죽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정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저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다”(57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단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우리에게 씌워졌던 죽음의 저주와 형벌을 말하며, 죽음의 세계, 사탄의 지배, 죄의 권능,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며 찬송가 1절이 외치고 있는 핵심 즉 “죄 사함 받은 우리도 주 함께 살리라.”는 내용입니다.
찬송 예화
부활의 신앙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부활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으며 목격한 사람들이 "우리가 그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류역사상 예수님 부활사건처럼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일이 없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와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을 발견한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인 부활 능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볼 때 예수의 부활능력 안에서 보므로 이 세상이 마지막이 아니며 시간적 여유가 있으므로 결코 초조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높은 망대 위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큰 유혹도 "별것 아니다"며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우리의 생명도 그를 따라 부활하게 되는 사실이 믿는 자의 소망이며, 신앙의 뿌리입니다.

<참고;http://yehwa.org ⓒ채수덕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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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온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십자가의 군대로 나선 우리들이 이슬 같은 생명에 스며든 세상의 유혹과 염려에 매이지 않고 힘 있게 행진 하며 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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