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장 인내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 통합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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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5[수]
367장 인내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찬송
성경 본문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찬송묵상
슬픔, 질병, 유혹, 고통, 괴롬, 짐이 있을 때에라도 인내하게 하소서
찬송요약
1절 주여 슬픔 가득차고 질병 있을 때에라도 인내하게 하소서

2절 주여 유혹 다가오고 괴롬 있을 때에라도 인내하게 하소서

3절 주여 고통당할 때에 위로하사 인내의 영성 알게 하소서

4절 주여 정죄당할 때에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5절 주여 암흑 속에 갇혀있을 때에라도 용서하사 인내하게 하소서
찬송해설
‘인내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각 절에서 6번이나 반복하는 것도 모자라 후렴에서 ‘주여 참는 맘을 주어’를 반복 사용하여 인내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기도와 간구의 찬양이다. 찬송가 1절에서는 슬픔과 질병을 2절에서는 유혹과 괴롬을 3절에서는 고통을 4절에서는 정죄당할 때에 5절에서는 짐이 무거워 눌려 있을 때에 6절에서는 암흑 속에 있을 때에라도 인내하게 하소서 찬양하고 있다. 작사자 I.Prohanova이며, 작곡자는 I.Kajakov이나 두 사람 다 알려진 바가 없다.
찬송프롤로그
1절 인내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슬픔 가득차고 질병 있을 때

주여 주여 주여 참는 맘을 주여 주여 주여 참는 맘을



1절, 주여 슬픔 가득차고 질병 있을 때에라도 인내하게 하소서



누가복음 7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와 허다한 무리들과 함께 나인이라는 성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반면 12절에는 사람들이 죽을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고 그 뒤에는 과부로 보이는 한 여인이 슬픔과 비통에 빠져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두 그룹을 잘 비교해보십시오. 한 그룹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세우고 나인성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생명의 대열이고, 또 다른 그룹은 죽은 시신을 앞세우고 성에서 나와 장지로 가고 있는 죽음의 대열입니다. 그리고 이 두 그룹은 성 가까이에서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이 두 그룹에는 많은 무리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허다한 무리’가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생명과 죽음이 어느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생명이요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모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아파하고 고통하며 괴로워하는 이웃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과부를 유심히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과부였으며, 또 죽은 자는 그녀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젊은 아들이었습니다. 과부는 당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회적 영향력도 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다가 아들까지 죽었으니 사실 이 여인의 인생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아들은 여인에게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때로는 남편의 빈자리를 메워주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의 의지요 기둥이 되기도 합니다. 정신적 지주가 됩니다. 여인에겐 소망이요, 꿈입니다.



여인은 이아들이 자라는 것 보면서 인생의 낙을 삼았을 것입니다. 이아들을 통해 남편의 대를 이어 가문을 세워보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 여인의 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자식들 중에서 메시야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꿈입니까? 그래서 전부 이 꿈을 꾸면서 아들 낳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많은 사람이 이름을 '예수', 구원자라 이름 짓기도 했습니다.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는 기대는 당시 여자들, 엄마들에게는 당연한 꿈이었습니다. 마찬가지, 이아들은 여인의 삶의 이유요, 존재이유였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이 여인에게 당신은 왜 사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들 때문에 삽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들의 자리가 그렇게 컸습니다. 그런데 이아들이 죽어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젊은 나이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여인 안에 있는 모든 기대와 꿈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포기입니다.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시도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이 여인만큼 예수님의 능력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예수님이 손을 쓰지 않으면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아마 우리 중에서도 이처럼 절박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경제위기로, 자녀 가출로, 사업의 부도로, 직장에서의 강제 퇴직 등으로 모든 꿈과 비전을 다 잃어버린 채 절망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웃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주목하고 관심과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이 찾는 사람은 문제없는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웃음 짓는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승리의 환호성이 아닙니다. 이런 많은 사람의 모습 속에 감춰져있는 한 사람의 눈물과 실패, 아픔을 보십니다. 이들은 감히 울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슬픔이 너무 커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힘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돌아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송 예화
-사죄의 은총-



한 일본 그리스도인의 직접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글로 썼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를 하고 그래서 1940년 초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샌프란시스코 교외에서 장미 농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스위스에서 이민 온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장미농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가정은 매우 가까워졌고, 스위스에서 이민 온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었는데 함께 살면서 농사도 같이 지으며 대화도 자주하고, 또 그러다가 전도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일본 사람은 조용히 미소만 짓고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두 가정은 아주 친하게 지냈고, 또 일주일에 두 차례, 세 차례는 장미를 팔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의 시내로 들어가서 같이 장미를 팔아 돌아오곤 했습니다. 농장 일은 아주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정부에서는 미국에 살고 있으면서 미국시민으로 귀화하지 않은 일본 사람들을 수용소에 수용하는 정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일본 사람은 아직까지 미국시민으로 귀화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결국 콜로라도에 있는 수용소로 가야만 했습니다. 일본에서 사업 실패한 후, 미국에 와서 고생하면서 모처럼 성공한 사업인 농장을 두고 떠나야 하는 그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때 이웃집의 스위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가 있는 동안 내가 농장을 잘 돌봐 주겠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일본 사람은 겉으로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가면 정말 도와줄까?”하고 의심했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스위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걱정하지 마세요.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안심하고 떠나세요.” 그가 수용소에서 2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었을 때, 전쟁이 끝나게 되었고, 드디어 2년 만에 그리운 집과 농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웃 스위스 사람이 큰 플래카드를 들고 역으로 환영을 나온 것입니다. “Welcome back home!”그리고 집에 와 보니 농장은 자신이 가꿀 때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었고 아름다운 장미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엌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농장에서 나온 수익금을 저금해 놓은 통장이었고 그 옆에는 조그마한 카드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딱 두 줄이 쓰여 있었습니다. “God loves you!(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You could start again(당신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고백하기를 “당신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싶습니다.” 마침내 그는 주님 앞에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인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너무나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 살아가는 날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셨다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참고: 인터넷 목회자정보클럽/안양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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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믿음의 진가는 얼마만큼 인내 할 수 있느가? 에 따라 믿음의 수준이 구 별 됩니다. 십자가의 인내로 내게 주어진 역경 속에서 감사하며 늘찬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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