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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5[월]
106장 아기 예수 나셨네
찬송
성경 본문
눅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찬송묵상
피리불고 소고 치며 찬양하라 아기 예수 나셨네
찬송요약
1절, 예언자의 말대로 구세주 탄생했네 세세토록 주를 찬양하여라
2절, 사랑스런 예수님 흠이 없고 순전한 자비로운 구세주
3절, 아기예수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하늘평화 주시네
찬송해설
눅 2:11-12절 말씀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가 4번이나 나온다. 반복법을 통해 아기 예수 탄생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있는 성탄 찬송으로 18-19세기 프랑스에서 널리 불리던 캐롤송을 조지 에반스(G.K.Evans;1917~  )가 1963년에 번역하여 ‘거룩하신 아기 예수 나셨다.’라는 제목으로 ‘세계의 성탄캐롤’에 처음 발표하였다. 찬송 곡은 미국 연합감리교회 장로 카툰 레이몬드 영(C.R.Young;1926~  )이 1988년 편곡하였다.
찬송프롤로그
2절 아기 예수 나셨네 피리 불고 소고치며 주를 찬양하여라 아기 예수 나셨네
사랑스런 예수님 완전하고 순전한 주 흠이 없고 순결한 자비로운 구세주

2절, 사랑스런 예수님 흠이 없고 순전하며 자비로운 구세주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에 만왕의 왕, 평강의 왕, 만유의 구세주, 기묘자, 전능자, 모사로 오신 예수님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리마다 휘황찬란한 성탄트리에 각종 장식을 매달아 놓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앞서 우리는 “완전하고, 순전하며, 흠이 없고 순결하신 아기 예수님” (찬송가 2절)으로 말구유위에 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다스릴 메시아 예수님께서 왜 팔레스타인의 한 작은 마을의 마구간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의 탄생을 이런 방식으로 택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위대함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 즉 권력자, 지배자, 통치자, 경영자가 아닌 소외되고 상처받고, 병든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또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자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예수는 이 땅의 권력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궁중에 태어나시지 않고, 몰락한 다윗 왕조의 고향인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 자리는 권력의 자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권력에 대한 야망을 가진 자들이 줄을 대려고 찾아올 만한 어떤 빌미도 찾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또한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예수는 또한 이 땅의 모든 풍요의 대명사인 물질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가난한 목수의 가정을 택하여 탄생하셨습니다. 만약 요셉이 좀 부유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그날 밤 주변머리 없이 만삭이 된 마리아를 마구간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할지라도 돈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아늑한 방 하나쯤은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순진한 시골 청년인데다가 돈마저 없었기에 남의 집 마구간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그는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스스로는 가난해지신 것입니다(고후 8:9). 이 땅의 부요는 진정한 부요가 아니기에 그것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예수는 이 땅의 모든 명예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받아야 할 명예, 메시아가 받아야할 명성을 거부하셨습니다. 이 땅의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는 권력과 부는 없어도 명예를 얻었던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명예마저 거부하셨습니다. 이 땅의 명예나 명성이란 부질없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기 예수는 이 땅의 사람들이 얻기를 원하는 위대함, 권력, 물질, 명예를 모두 거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거부가 교훈하고 있는 가르침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완전하고, 순전하며, 흠이 없고 순결하신 아기 예수님” (찬송가 2절)의 모습을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얼마나 겉치레의 위선적인 모습으로 성탄절마다 가증스럽게 고아원과 양로원과 각종 복지단체를 방문하며 자기 교회의 크기와 성도수를 자랑해왔습니까? 고아원과 양로원 식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진 찍기라고 합니다. 별반 대수롭지도 않은 것을 그것도 1년에 단 한번 방문하여 전달하면서 교회와 신문에는 대서특필하여 자랑합니다. 마치 경쟁을 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한해에 수없이 찾아와 학생들과 어른들을 수발하며 말없이 봉사하는 자들은 절대로 그런 사진 안 찍습니다. 오히려 학생들과 어른들이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고 해도 도망을 갈뿐 좀처럼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왜 그렇게 사진을 좋아하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 결과 허울뿐인 기독교, 자기 자랑만 일삼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라는 낙인만 찍혔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마구간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좀 더 긍정적인 모습으로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가장 큰 희생과 사랑의 표적으로 구유에 누워 계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계집종의 비천함"(눅 1:48)과 ‘순결함’과 ‘정결함’을 보시고 마리아의 몸을 빌리셨으며, 버림받은 계층 가운데 하나인 목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이 제일 먼저 전하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의 기쁨은 누구보다도 먼저 가장 슬픔을 당한 자에게, 가장 큰 근심을 안고 있는 자에게, 가장 외로운 자에게, 가장 곤고한 자에게 먼저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성탄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것도 두려울 할 것이 없으며, 동방방사처럼 가장 귀한 것을 드려 아기 예수님께 경배할 것입니다.

둘째,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는 또한 평화의 표적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듯이 나라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시편과 계시록은 노래하고 있는데(시 2:9,계 12:5), 아기 예수는 연약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오셨고, 그의 삶 전체가 폭력과는 상관이 없는 평화로 일관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강압적인 방법에 의해 이 땅을 변화시키는데 있지 아니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하심에 있습니다. 초라한 구유에 고요히 누워 잠든 아기 예수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역사의 표적입니다. 평화롭게 누워있는 아기의 모습에서 우리는 전쟁 대신에 평화를 생각합니다. 완악한 마음 대신에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참된 평화를 이 땅에 심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쁜 성탄절에 베들레헴 마구간 구유에 고요히 누워 계신 아기 예수를 다시 한 번 바라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십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기다리던 메시아입니다. 그의 겸손하고 가난한 탄생은 바로 우리의 허영과 욕망을 거부하며, 이 땅의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를 거부하신 것이며, 사랑과 평화와 겸손으로 이룩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오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듣고, 그 뜻을 따라 우리도 어리석었던 욕망과 자존심을 버리고, “순전하고, 흠이 없고, 순결한 모습으로”(찬송가 2절) 주님의 뒤를 따라 사랑과 평화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 예화
파파파노 할아버지의 크리스마스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파노라는 착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파파파노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하루 일과를 보내고는 곤히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의 꿈속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파파파노야, 내일 크리스마스 날 내가 네 구둣방을 방문하고 싶구나.”
크리스마스 아침, 예수님의 방문을 약속 받은 할아버지는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만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꺼내어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난로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구둣방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준비를 마친 파파파노 할아버지가 밖을 내다보았지만 청소부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길 건너편의 청소부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이리 들어와요. 추운데 몸 좀 녹이고 커피라도 들어요.” 점심때가 되도록 창밖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누더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홑이불로 어린 아기를 감싸 안고 걸어갑니다. 파파파노 할아버지는 그 여인을 측은히 여겨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무심코 아기의 발을 보니 빨갛다 못해 파랗게 얼어 있었습니다. ‘아기가 신발이 필요할 텐데, 쯧쯧.’ 할아버지는 어젯밤 만들어 놓았던 조그마한 신발을 신겨 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꼭 맞았습니다. 아기와 여인은 행복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겨울의 해는 빨리도 넘어갑니다. 이미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준비를 위해 올려둔 스프와 빵이 데워지고 있을 때 한 떼의 거지들이 나타났습니다. 파파파노 할아버지는 그 거지들에게 자신이 먹을 스프와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거지들은 모처럼 행복한 성탄절을 보낼 수 있었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파파파노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녁이 되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의자에 털썩 주어 앉았습니다. “결국 꿈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혹시 내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쳐버렸나?”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꿈속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파파파노야, 너 오늘 나를 보았지?” “예수님, 어디 계십니까?” “저는 오늘 하루 종일 구둣방에서 기다렸지만 예수님을 뵙지 못했는데요.” “나는 오늘 네 가게에 세 번이나 방문했단다. 한 번은 청소부로, 한 번은 아기를 안은 누추한 여인으로, 한 번은 거지로 말이야. 그때마다 네가 나에게 베풀어 준 따스한 사랑에 정말 감사하고 싶구나.” 순간 할아버지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기쁨으로 가득 차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오 주님, 오늘은 주님의 생일이에요. 주님의 나심을 축하드립니다.
<참고: 인터넷 목회정보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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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순결하고 흠 없으신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온 땅이 축하하며 찬양합니다. 사랑스런 예수님 완전하고 순전한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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